최근 주요 증권사 기업금융본부장들을 만나면 빼놓지 않고 던지는 질문입니다. ‘코로나19발 양적완화(QE)’가 명백히 종지부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당장 올해 상반기부터 팬데믹 이전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R(침체)의 공포’가 다시 머리를 내밀지도 모릅니다.
팬데믹은 ‘코로나 블루’라는 표현과 정반대로 주식과 인수·합병(M&A) 시장에 이례적인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단군 이래 가장 싼 이자로 돈을 빌린 기업들은 신사업 인수에 적극 나섰고, 투자자들은 환호했습니다.
빚을 내 기업을 인수하는 일에 관대한 분위기는 심지어 ‘전통적 비관론자’ 신용평가산업에서도 두드러졌는데요. 이런 태도 변화는 몇몇 인상적인 사건으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중 하나는 2020년 11월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NAND) 사업부 인수입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무려 90억달러어치 사업 인수를 결정한 SK하이닉스의 신용등급(AA) 전망을 곧바로 ‘부정적’으로 내리며 ‘워치독(watch dog)’ 본능을 발휘했는데요. 놀랍게도 작년 6월 다시 ‘안정적’으로 되돌려놨습니다. 쉽게 납득하기 어렵지만, ‘빚이 크게 늘더라도 낸드 사업 경쟁력을 키울 수 있게 됐다’는 게 ‘7개월 만의 원상복구’ 결정에 관한 변이었습니다.
2021년 6월 이마트의 이베이코리아 인수 직후 나온 평가들은 더 흥미롭습니다. 신용평가 3사는 인수금액이 3조4000억원에 달해 “재무안정성 지표의 명백한 저하가 나타날 것”이라고 쏘아붙였는데요. 정작 고객사의 목에 등급강등 ‘방울’을 달겠다고 앞장서는 곳은 없었습니다. 대신 "온라인 신사업 강화 시너지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말로 기존 이마트의 ‘AA(안정적)’ 등급을 너그럽게 감싸 안아줬습니다.
상식적인 눈에서 대한항공의 신용등급도 미스터리에 가깝습니다. 여객 수요가 증발했는데 코로나19 이전과 똑같은 ‘BBB+’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신용평가사들은 대한항공 등급의 버팀목으로 ‘정책금융 지원’을 지목합니다. 정부가 돕고 있으니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부담도 아직 부도위험을 키우는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는 해명입니다. 아마도 ‘비우량 기업의 비우량 기업 인수’라는 최악의 이벤트를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였을 겁니다.
그동안 M&A는 대상과 조건을 떠나 최악의 신용 사건(credit event)으로 보는 게 신용평가업계의 상식이었습니다. 채권자 원리금을 갚기 위해 곳간에 쌓아둬야 안심할 수 있는 ‘캐쉬’를 경영권 프리미엄 지불에 통 크게 써버리는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직후 냉정하게 등급 강등에 나섰다가 막대한 고객이탈 ‘쓴맛’을 봤던 한국신용평가를 반면교사로 삼은 걸까요? 아니면 사상 초유의 전염병 사태를 맞은 국가와 기업의 미래를 망쳐놓을까봐 주저하는 걸까요. 어쨌든 ‘고객 사랑’을 실천하기로 합심한 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너그러움입니다.
신용평가사와 기업의 이같은 ‘코로나19 허니문’ 분위기를 불만스러워 할 만한 기업도 많습니다. KCC가 대표적인데요. 2019년 실리콘 사업을 하는 모멘티브 지분 인수를 이유로 수개월간 등급 전망이 떨어졌고, 2020년엔 신용등급마저 강등(AA→AA-) 당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모멘티브가 사상 최대 영업이익 경신의 ‘효자’ 역할을 하고 있지만, 당시엔 지금처럼 인내심을 보여주는 신용평가사가 없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만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은행은 작년 하반기부터 기준금리를 인상하며 허니문의 종료를 알리는 ‘공식적인 종’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업들은 팬데믹 고통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틀었던 ‘유동성 파티 음악’의 종료와 함께 다시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 시작점이 중국의 부동산 붕괴일지, 미국 주식의 폭락일지, 아니면 지리한 스태그플래이션(침체 속 물가상승)일지 알 수 없지만 음악을 마냥 틀어놓을 수는 없으니까요.
코로나19 허니문의 종료는 잔혹사의 시작을 뜻합니다. 사상 최대 기업공개(IPO)와 유상증자를 이끌었던 주식 시장의 흥이 깨지면 빚더미 좀비기업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집니다. 이자비용의 상승은 정책금융 ‘베일’에 감춰져있던 부도 기업수를 다시 늘릴 겁니다. 신용평가사들의 ‘저승사자’ 본능도 되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2~3년이 지난 시점부터 신용평가사들이 수많은 건설회사들에 대대적으로 ‘부실 기업’ 낙인을 찍었던 것처럼요.
물론 현재로선 2022년이 금융사상 지극히 특이한 사례였던 2020년, 2021년과 비슷할지 아니면 판이하게 다를지 알 수 없습니다. 최근 주가 조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종목이 사상 최고의 멀티플(Price Earning Ratio·실적 대비 주가 수준)을 경신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글의 첫머리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IB 본부장들로부터 얻은 답변은 거의 모두 “2022년에도 호황을 이어갈 것이다”였습니다. 중앙은행들의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기업과 시장의 ‘코로나19 허니문’의 연장을 낙관한 셈입니다. 증권산업 종사자의 이런 맹목적 낙관론은 불길하게도 2000년 닷컴버블 붕괴 직전과 크게 닮아 있습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