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늦가을 청량리
할머니 둘
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 유자효 : 1947년 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직』, 『심장과 뼈』, 『사랑하는 아들아』, 『성자가 된 개』, 『내 영혼은』, 『떠남』, 『짧은 사랑』, 『꼭』 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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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내 인생의 주행거리는 얼마나 될까?
신설동에서 청량리까지는 시내버스로 네 정거장, 약 15분 거리입니다. 지하철로는 2구간 4분,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거리죠. 걸어가도 30분이면 됩니다. 이 짧은 거리가 두 할머니에게는 여태까지 걸어온 인생의 주행거리입니다.

이 시는 속도와 시간, 거리와 공간의 의미를 사람의 일생으로 응축해 보여줍니다. 이런 장면을 포착해서 순간 스케치처럼 보여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의 한켠에는 ‘느린 속도’와 ‘멈춘 걸음’과 ‘생의 비의’가 함께 있습니다.

“속도를 늦추자 세상이 넓어졌다”

그 속에서 깊은 성찰의 꽃이 피어납니다. 유자효 시인은 평생 시인과 방송기자라는 두 길을 바쁘게 걸어왔습니다. 부산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진해군항제 백일장 등의 장원을 휩쓸고, 대학 시절 가정교사로 바쁜 중에도 스물한 살 때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그 뒤로는 기자가 되어 KBS 파리 특파원과 SBS 정치부장, 보도제작국장, 논설위원실장 등으로 종횡무진했죠.

은퇴 후 ‘어릴 때부터 걷고 싶었던 시인과 기자의 두 길’을 ‘한 길’에서 만나게 되면서 그는 더 내밀한 세상의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시 ‘속도’를 한 번 볼까요.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이 시처럼 삶의 속도를 늦추면 세상이 넓어 보입니다. 속도를 더 늦추면 세상이 더 넓어지고, 아예 멈춰 서 버리면 세상이 모두 환해집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지요.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것 중에서 소중하고도 살가운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지난해 봄 신문 칼럼에 이렇게 썼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찾아본 집 근처 산에는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의 데이트였습니다. 연애 시절에는 그리움에 안달복달했었건만, 결혼 이후 아내와의 대화는 생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무려 반세기 만에 찾게 해준 것이 이 듣도 보도 못했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였습니다.’

환하게 피어나는 봄을 만나기 위해

우리 또한 ‘멈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속도가 늦어지고, 모든 일상이 단절됐지요. 고요 속의 단절과 격리는 뜻밖에도 우리 속의 ‘숨은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비로소 보이는 세상의 이면과 틈새, 그 사이로 넓어지는 삶의 지평, 그 위에 피어나는 새로운 발견의 꽃잎….

이런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가족과 사랑의 의미도 특별해 보이겠지요. ‘아침 식사’라는 시에서 그는 ‘아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송곳니로 무 조각을 씹고 있는데/ 사각사각사각사각/ 아버지의 음식 씹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때 아버지도 어금니를 뽑으셨구나// 씹어야 하는 슬픔/ 더 잘 씹어야 하는 아픔’이라고 썼습니다. 작은 식탁 위에 3대의 인생이 겹쳐지는군요. 짠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마음이 환해집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지요.

그는 그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간격’까지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간격과 거리는 곧 무한천공의 우주로 펼쳐집니다. 이럴 때 그는 ‘그리움’이라는 배를 타고 유영하는 우주항해사 같기도 합니다.

‘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거리’ 전문)

이 모든 게 속도를 늦춰야 보이는 것들이지요. 저도 오늘부터 생의 보폭을 줄여보려 합니다. 더 천천히, 더 느리게, 마침내 한 지점에 멈춰 서서 환하게 피어나는 세상의 봄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지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