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읊다(偶吟)


사람들이 바른 선비를 대하는 것은
호랑이 가죽을 좋아하는 것과 같아
살았을 땐 잡아죽이려 하고
죽은 뒤엔 아름답다 떠들어대지.


* 조식 (曺植·1501~1572) : 조선 중기 대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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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살았을 땐 죽이려 하고 죽은 뒤엔 아름답다…
16세기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세상의 속된 인심을 호랑이 가죽에 빗대어 쓴 풍자시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요. 언행이 올바른 사람을 보면 모두가 존경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마뜩잖고 불편해서 시기하고 헐뜯기 바쁘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깎아내리고 없애려 듭니다.

그러다 ‘눈엣가시’가 없어지고 나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참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아깝다”며 칭송합니다. 호랑이가 가축이나 사람을 해치니까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그 가죽으로 옷이나 장식품을 만들고 나서는 참 좋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지요.

벼슬 않고 임금 잘못 신랄 비판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조식은 어릴 때부터 의기(義氣)가 남달랐습니다. 18세 때 물 한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밤새도록 서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연마할 정도였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도(敬義刀)라는 칼을 지니고 늘 방심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처음부터 벼슬의 뜻을 버려서 과거 시험은 보지도 않았습니다. 당시는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선비가 희생되는 격변기였죠. 그런 상황에서 권력 주변에 가지 않고 초야의 처사(處士)로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실제 생활도 그랬습니다. 김해로 옮겨 살던 30~40대 때 그의 학덕이 널리 알려져 벼슬이 계속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지요. 경상도 관찰사 이언적(李彦迪)이 그의 명성을 듣고 몇 번이나 만나길 청했지만 “벼슬길에 나가 있는 사람과 만날 뜻이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45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오로지 제자 교육에 매진했죠. 이후에도 여러 벼슬에 임명됐지만 모두 사직했습니다. 단성 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에서는 조정 신료들과 국왕 명종, 대비 문정왕후를 신랄하게 비판해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전하가 나라를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임금에게서 멀어졌습니다. (…) 자전(慈殿)은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다만 선왕의 고아이시니….”

남명학의 큰 산맥으로 우뚝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직언이었죠. 이런 용기와 기개 덕분에 그는 당대 지식인들의 흠모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를 토대로 이황의 성리학 관념철학과 달리 원시유학의 실천철학으로 ‘남명학(南冥學)’의 큰 산맥을 이뤘습니다.

환갑 때 지리산 기슭의 산청으로 이사해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의병장 곽재우 등 이름난 제자 100여 명을 키웠습니다. 한편으론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통해 당시 관리들의 폐단을 날카롭게 파헤쳤죠. 또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 등을 펼치며 정치권의 각성과 개혁을 끊임없이 주창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무슨 직함이나 벼슬자리는 다 사양했지요. 그가 산천재에서 일흔두 살에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한 사후 칭호는 젊은 날 마음에 새겨두었던 ‘처사’였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