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유럽 ESG 최전선
러시아 국영 에너지회사 가스프롬.사진=TASS
러시아 국영 에너지회사 가스프롬.사진=TASS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유럽연합(EU)의 노력이 구체화 되고 있다. EU는 지난 5월 18일 러시아산 에너지 독립을 위한 ‘리파워 EU(REPowerEU)’ 세부 계획안을 발표했다. 지난 3월 초 공개한 개요에서 한발 더 나아간 실행 방안을 담은 것이다. 그동안 러시아가 유럽 일부 국가에 가스 공급을 실제로 중단하면서 에너지 안보 위기가 현실로 닥쳤다. EU의 움직임도 그만큼 빨라지고 있다.

에너지 무기화 막는다

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리파워 EU의 목적은 뚜렷하다. 첫째, 경제적·정치적 무기로 사용되면서 연간 1000억 유로가 드는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을 끝내는 것이다. 다음은 기후 위기 대처다. 유럽 그린딜 발표와 함께 강화된 유럽 내 에너지 전환이 러시아 침공을 계기로 힘을 받는 모양새다. EU에 따르면, 현재 유럽인의 85%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답했다.

리파워 EU의 골자는 단순하고 익숙하다. 에너지절약과 에너지 공급처 다각화, 가정 및 산업, 발전 부문에서 재생에너지 사용을 통해 EU 역내 에너지 보안을 지킨다.

현재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에너지 소비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유럽은 단기간에 가스 및 석유 수요를 5% 줄일 수 있도록 가정이나 산업계를 대상으로 캠페인을 진행한다. 그린딜 법안에서 목표로 했던 에너지 효율도 기존 9%에서 13%로 상향 조정한다. 구체적으로는 에너지 효율적인 난방 시스템, 건물 단열재, 가전제품 등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인하하는 등 재정적 지원을 제공한다. 운송 부문에서 에너지를 절약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배출 없는 모빌리티, 즉 전기차 및 수소차 전환도 가속화할 예정이다.

에너지 공급·종류 다각화

에너지 공급 다변화는 미국, 카타르 등으로부터 LNG를 수입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EU는 “지난 수개월간 에너지 공급 다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국제 파트너와 협력했으며, 기록적인 수준의 LNG 및 파이프라인 가스 공급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EU 에너지 구매 플랫폼도 신설됐다. LNG, 수소 등 EU 역내에 필요한 에너지를 구입할 때 더 저렴한 비용으로 공동구매를 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가스 저장 시설을 미리 충전하기도 한다. EU 역내의 에너지 수요 공급 및 안보를 개별 국가 단위가 아니라 회원국 전체가 함께 대응하겠다는 의미다. 카드리 심슨 EU 집행위 에너지 담당국장은 “러시아 화석연료 의존 종식을 위해 EU는 세계 가스 시장에서 집합적인 정치 및 시장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며, “EU 플랫폼을 통해 가능한 한 최상의 조건에서 가스 수입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EU는 에너지 플랫폼으로 우크라이나는 물론 몰도바, 발칸 반도 서부 지역 등 동유럽 국가도 지원할 예정이다. 리파워 우크라이나(RePowerUkraine) 프로그램을 통해 재생 가능 전기 및 수소 거래 등 에너지 공급 보안을 위해 협력한다. 여전히 러시아산 에너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지역들로 러시아 견제 의미가 강하다고 분석된다.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도 높인다. EU는 유럽 그린딜 법안으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40%에서 45%로 상향한다. 이를 위해 2025년까지 태양광발전 용량을 2배로 늘리고, 2030년까지 발전용량 600 GW를 설치할 계획이다. 신축 공공 및 상업, 주거 건물에는 태양열 패널 설치가 의무화된다.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위한 승인 절차도 간소화하고, 재생에너지 전용 지대를 마련해 관련 데이터를 제공할 예정이다.

수소에너지 규모도 커진다. EU는 2030년까지 유럽 역내 수소 생산을 1000만 톤, 수소 수입 1000만 톤을 목표로 한다. 수소는 신속한 탈탄소가 어려운 산업이나 운송 부문에서 탄소 기반 연료를 대체할 수 있다. 러시아 에너지 문제로 급작스럽게 수입하게 된 LNG 처리를 위한 터미널도 장기적으로는 수소 터미널로 대체하려 한다. EU는 수소 프로젝트를 위한 연구개발에 2억 유로를 추가로 지원한다고 밝혔다.

리파워 EU 달성을 위해 2027년까지 2100억 유로의 추가 투자가 이뤄질 전망이다. EU 집행위는 재생에너지 투자 외에도 LNG 인프라 구축 100억 유로, 석유 인프라 15∼20억 유로, 전력망에 290억 유로 등 투자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EU가 팬데믹 이후 경제 회복을 위해 마련한 경제 회복 및 복원력 강화 프로그램(The Recovery and Resilience Facility) 자금을 활용한다. 여기에 러시아 화석연료 의존을 중단함으로써 연간 1000억 유로를 확보할 수 있다.

러시아, 가스 공급 중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유럽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를 규탄하며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와중에도 러시아산 가스는 흐르고 있었다. 독일 또한 지난 5월 초 기준 국내 가스 수요의 35%를 러시아산 가스로 충당했다. 지난해 말 55%에 비해서는 줄어든 편이지만, 여전히 러시아산 가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 파이프라인 밸브를 잠그기 시작했다. 러시아 국영에너지 기업 가즈프롬은 지난 4월 27일 불가리아와 폴란드에 가스 공급을 중단했다. 러시아가 요구한 루블화 지불을 거부했다는 이유다. 지난 5월 21일에는 핀란드에 가스 공급 중단을 통보했다. 핀란드가 중립국 원칙을 깨고 나토에 가입한 지 이틀 째 되는 날이었다. 마찬가지로 루블화 지불을 이유로 들었지만, 나토 가입에 대한 보복 조치로 해석된다. 유럽 국가들이 ‘설마’했던 에너지의 무기화가 실현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러시아의 압박용 조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폴란드의 경우 국내 가스 저장 비율이 76%로 충분하며, 현재 수요 또한 LNG로 공급이 가능한 상태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이들 국가에 수출하는 가스 비중이 미미하다. 가스 공급을 끊어도 상호 간 큰 타격이 없다는 뜻이다. 러시아가 불가리아와 폴란드에 가스 공급을 중단하자 유럽연합 다른 회원국이 에너지를 공급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러시아 정부가 우리를 협박하기 위해 화석연료를 사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집행위는 회원국 및 국제적 파트너와 긴밀한 조정과 연대 아래 (이를) 준비해왔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함께 조정해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EU 발표에 이어 폴란드 정부는 지난 5월 23일 1993년부터 지속되어온 러시아와의 가스 계약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러시아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계약 파트너’가 아니라는 것이다.

러시아 가스를 계속 공급받고 있는 독일도 마음이 급하다. 독일은 지난 5월 5일 LNG 부유식 터미널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 이 터미널은 올해 말에 가동할 예정이다. 보통 LNG 부유식 터미널이 가동되는 데 5년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속도다. 이를 위해 독일 정부는 승인 절차를 단축하는 LNG 가속법(LNG-Beschleunigungsgesetz)을 내놓았다.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가스 파이프라인이 서서히 닫히고 있다.

베를린(독일)=이유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