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 신라면은 '탄광 속 카나리아'다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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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광고를 멍하니 지켜보다 눈이 크게 떠졌다. 농심 신라면을 싸게 판다는 마켓컬리의 광고였다. 유통산업을 담당하는 기자로서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선, 컬리의 영역 확대가 인상적이었다. ‘맛있는 아보카도’에서 시작한 컬리가 이젠 ‘식탁 위 모든 상품’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 꼬리를 문 생각은 ‘컬리는 과연 신라면을 얼마에 공급받았을까’였다. 일단 마켓컬리 앱을 열고 신라면을 검색했다. 그 중 ‘신라면 5개입’ 상품이 눈에 띄었다. 왼쪽 하단엔 소박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저가 도전’.
아,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표현인가. ‘최저가가 아닌 줄은 알지만, 최대한 최저가에 근접한 수준이라는 것을 컬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대충 알아듣고 넘어가 달라’는 간곡 화법이 두 단어로 이뤄진 짧은 문장에 담겨 있다.
잠수함 속 토끼는 함 내 산소 수치를 알려주는 살아있는 측량기였다. 한국 유통과 식음료 제조사들이 약 30년간 써내려 온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신라면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이런 신라면이 컬리 메인 광고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기존 오프라인 유통업계엔 위험의 신호다
유통과 식음료 제조의 전쟁은 무려 3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첫 발화지는 이마트였다. 1993년 창동점을 시작으로 한국형 할인점의 문을 연 이마트는 빠른 성장 속도로 기존 식음료 유통 구조를 바꿔 나갔다.
월마트, 코스트코가 그랬듯이 이마트는 좋은 품질의 물건을 가장 저렴하게 소비자에게 판매한다는 것을 업의 철칙으로 삼았다. 농·축·수산물의 유통 단계를 줄이고, 대량 구매로 가격을 낮춤으로써 신선한 양질의 제품을 매대 위에 올렸다. 창업 10년쯤이던 2000년대 중반에 이마트는 벤치마킹 대상이던 월마트를 한국에서 백기 투항하도록 만들 정도로 급격히 영향력을 키웠다. 바야흐로 유통의 전성시대였다. 이마트는 식음료 공산품을 타깃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들 대형 식음료 제조사들의 전국 대리점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퇴직 임원들이 제2의 삶을 살기 위한 거점이 이들 대리점이었다. 제조사의 대리점망은 요즘의 배달, 택배업과 비슷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취업이 쉬웠기에 갈 곳 없는 청춘들이 이곳에서 직업을 찾았다. 1t짜리 작은 미니 트럭에 한가득 과자며 음료 등을 싣고 자신의 영업망을 돌면서 동네 슈퍼 사장들에게 물건을 팔았다.
유통을 통제하려는 제조사의 욕구는 한결같다. 가전 제조사들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여전히 각자 유통 매장을 운영한다. 롯데하이마트, 전자랜드 등 가전 양판점들이 등장했지만, 가전 시장에서 제조사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삼성, LG전자의 의도는 딱 하나다. 가격결정권을 누가 쥐느냐다.
삼성, LG전자 입장에서 국내 판매 가격이 무너지면 이는 전 세계 수출가에 직격탄이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 같은 소위 하이엔드급 해외 브랜드들도 똑같은 전략을 구사한다. 전 세계 백화점에 직영 매장을 내고, 영업 직원도 직접 뽑는다. 이들 브랜드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백화점은 유통사라기보다는 매장 임대인에 가깝다.
‘명품’ 브랜드의 가격 통제권은 심지어 면세 유통의 취지를 무력화시킬 정도다. ‘이론상’으로는 수입 관세가 면제되는 샤넬 백이 백화점 매장 가격보다 싸야 하지만, 실제로는 면세점 가격이 더 높은 경우도 꽤 많다. 면세점 업계 관계자는 “대형 브랜드들은 채널별, 국가별로 가격 편차가 크지 않도록 가격을 철저히 통제한다”고 말했다.
명품, 가전은 공급사가 워낙 소수의 독과점 구조여서 유통업체가 건드리기엔 난공불락에 가깝다. 이마트는 ‘에브리데이 로우 프라이스(everyday low price, ELP)’ 실현을 위해 우선 농심 신라면을 정조준했다. ‘적장을 잡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항복하는 법’이라는 게 2000년대 중반경 이마트 경영진의 생각이었다. 당시 나온 게 오픈 프라이스(open price) 정책이었다.
말 그대로 유통사가 가격을 열어 놓고 마음대로 팔겠다는 것이다. 제조사가 정한 소위 소비자 권장가격을 고려치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마트는 손해를 보더라도 신라면을 업계 최저가로 판매함으로써 집객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이후 이마트 등 할인점과 대형 식음료 제조사 간 관계는 평화와 공존으로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빅3’가 공급받는 신라면의 단가는 동일(납품단가 공개는 공정거래법상 위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조사의 판촉비 지출도 비슷하다. 농심의 경우 대형마트(할인점)에서 진행하는 판촉 행위를 외부 회사에 맡기고 이를 관리한다.
대형마트와 식음료 제조사 간의 동고동락은 의외의 효과를 발휘했다. 이마트는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e커머스의 가격 공세에 맞서기 위해 이를 십분 활용했다. G마켓, 11번가 등 오픈마켓에서 셀러들이 아무리 싸게 신라면을 팔아봐야 이마트 판매가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오픈마켓 판매상은 코스트코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떼와서 온라인에서 팔아야 하는 등 유통 단계를 하나 더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제조사의 대리점에서 오픈마켓에 물건이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래봐야 이마트보다 싸게 팔 수는 없었다.
이마트 등 대형마트가 제조사와의 공존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는 지난해 4월 명확하게 드러났다.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에 막 상장을 마친 후이던 4월 초 이마트는 2007년 폐지한 ‘최저가격 보상 적립제’라는 카드를 꺼냈다. 신라면, CJ햇반, 서울우유, 코카콜라, 삼다수 등 카테고리별 1위 상품을 비롯해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 칠성사이다, 새우깡, 케라시스 샴푸, 리스테린, 크리넥스 두루마리 휴지 등 가격 비교 상품 수는 500개에 달했다.
당시 이마트는 “쿠팡 가격보다 비싸면 차액을 보상해준다”고 선포했다. 이마트를 비롯해 대형마트 3사는 적어도 공산품에 관한 한 손해를 보지 않고도 쿠팡보다 싸게 팔 자신이 있었다. 제조사가 이마트에 넘기는 가격이 쿠팡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작년 상반기까지 쿠팡은 신라면 같은 1등 식음료 공산품 브랜드들을 손해를 감수하고 팔았다. 많이 팔면 팔수록 손해가 막심했다. 쿠팡은 농심에 대형마트 판촉비를 감안해서 공급가를 매겨달라고 읍소와 협박이 반반씩 섞인 요구를 끈질기게 해왔다. LG생활건강과는 아예 전면전을 불사했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은 쿠팡이란 ‘신생’ 유통업체를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해진 가격대로 대리점을 통해 물건을 받는 현 유통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상품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급기야 공정거래위원회까지 개입해 누가 공정거래 원칙을 어겼는지를 놓고 양사는 감정싸움을 거듭했다. 현재까지 LG생활건강의 화장품과 샴푸 등 유명 상품은 쿠팡에서 구하기 힘들다. 여담이지만, 면세점을 통한 중국 ‘대박’에 제동이 걸린 LG생활건강이 언제까지 쿠팡을 외면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도 지켜볼 일이다.
사실, 쿠팡은 작년 하반기 후반 무렵부터 주요 식음료 제조사들과 전쟁을 종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식음료 업계 관계자는 “농심이 신라면을 비롯해 생수 브랜드인 백산수 공급가를 대형마트와 거의 동일하게 쿠팡에 공급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쿠팡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에둘러 이렇게 표현했다. “식음료 제조사들과는 상생의 길을 걷고 있다”
식음료 제조사들로선 쿠팡, 컬리 등 e커머스 대표주자들의 바잉 파워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쿠팡은 지난해 184억637만달러(약 22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마트(SSG닷컴 포함해 약 18조원)를 처음으로 제쳤다. 마켓컬리의 매출도 지난해 1조5614억원에 달했다.
삼다수만 해도 LG생활건강이 유통을 맡았을 땐 쿠팡에 공급이 제한됐으나 광동제약으로 판매권이 넘어오면서 쿠팡 입점으로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농심으로선 백산수를 쿠팡에서 판매해야만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힘의 논리상 백산수를 팔려면 신라면, 새우깡이라는 대표 상품에서도 어느 정도 양보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신라면의 쿠팡, 컬리 최저가 판매는 이마트 등 대형마트의 생존과 관련해 일종의 임계점을 암시한다. e커머스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방어막이 뚫렸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새로운 경쟁 환경은 필연적으로 오프라인 유통 매장의 혁신을 가속할 것이다. 소비자로선 좋은 일이다. 방어막이 사라진 대형마트들은 신선 식품의 유통 단계를 더 줄여 질 좋은 프레시 상품을 매대 위에 올려놓을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마트 설립 30여 년 만에 새로운 유통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그다음에 꼬리를 문 생각은 ‘컬리는 과연 신라면을 얼마에 공급받았을까’였다. 일단 마켓컬리 앱을 열고 신라면을 검색했다. 그 중 ‘신라면 5개입’ 상품이 눈에 띄었다. 왼쪽 하단엔 소박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저가 도전’.
아,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표현인가. ‘최저가가 아닌 줄은 알지만, 최대한 최저가에 근접한 수준이라는 것을 컬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대충 알아듣고 넘어가 달라’는 간곡 화법이 두 단어로 이뤄진 짧은 문장에 담겨 있다.
유통과 식음료 제조의 끊임없는 전쟁과 평화의 역사
농심 신라면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고, 잠수함의 토끼다. 탄광 개발 초기에 광부들은 메탄이나 일산화탄소 같은 유독 가스에 노출될 일이 많았는데 이를 미리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카나리아를 활용했다. 갱도로 날아간 핑크빛 작은 새의 재잘거림이 울음이 되고, 결국 무음으로 사라지면 광부들은 그것을 유독가스 신호로 삼았다.잠수함 속 토끼는 함 내 산소 수치를 알려주는 살아있는 측량기였다. 한국 유통과 식음료 제조사들이 약 30년간 써내려 온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신라면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이런 신라면이 컬리 메인 광고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기존 오프라인 유통업계엔 위험의 신호다
유통과 식음료 제조의 전쟁은 무려 3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첫 발화지는 이마트였다. 1993년 창동점을 시작으로 한국형 할인점의 문을 연 이마트는 빠른 성장 속도로 기존 식음료 유통 구조를 바꿔 나갔다.
월마트, 코스트코가 그랬듯이 이마트는 좋은 품질의 물건을 가장 저렴하게 소비자에게 판매한다는 것을 업의 철칙으로 삼았다. 농·축·수산물의 유통 단계를 줄이고, 대량 구매로 가격을 낮춤으로써 신선한 양질의 제품을 매대 위에 올렸다. 창업 10년쯤이던 2000년대 중반에 이마트는 벤치마킹 대상이던 월마트를 한국에서 백기 투항하도록 만들 정도로 급격히 영향력을 키웠다. 바야흐로 유통의 전성시대였다. 이마트는 식음료 공산품을 타깃으로 삼기 시작했다.
거대 유통에 맞서 가격 통제권 쥐려는 제조사들
농심, 동서식품, 동원참치, CJ제일제당, 오리온, 유한킴벌리, 롯데칠성, LG생활건강, 아모레퍼시픽 등 쟁쟁한 식음료 기업(생활용품, 화장품 포함)들은 이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오랫동안 지배자로 군림해왔다. 그들은 상품을 제조하고, 유통 구조도 직접 통제했다. 대리점이라고 불리는 전국 유통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동네의 작은 슈퍼에서부터 편의점, 농협 하나로유통까지 물건을 공급했다.이들 대형 식음료 제조사들의 전국 대리점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퇴직 임원들이 제2의 삶을 살기 위한 거점이 이들 대리점이었다. 제조사의 대리점망은 요즘의 배달, 택배업과 비슷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취업이 쉬웠기에 갈 곳 없는 청춘들이 이곳에서 직업을 찾았다. 1t짜리 작은 미니 트럭에 한가득 과자며 음료 등을 싣고 자신의 영업망을 돌면서 동네 슈퍼 사장들에게 물건을 팔았다.
유통을 통제하려는 제조사의 욕구는 한결같다. 가전 제조사들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여전히 각자 유통 매장을 운영한다. 롯데하이마트, 전자랜드 등 가전 양판점들이 등장했지만, 가전 시장에서 제조사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삼성, LG전자의 의도는 딱 하나다. 가격결정권을 누가 쥐느냐다.
삼성, LG전자 입장에서 국내 판매 가격이 무너지면 이는 전 세계 수출가에 직격탄이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 같은 소위 하이엔드급 해외 브랜드들도 똑같은 전략을 구사한다. 전 세계 백화점에 직영 매장을 내고, 영업 직원도 직접 뽑는다. 이들 브랜드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백화점은 유통사라기보다는 매장 임대인에 가깝다.
‘명품’ 브랜드의 가격 통제권은 심지어 면세 유통의 취지를 무력화시킬 정도다. ‘이론상’으로는 수입 관세가 면제되는 샤넬 백이 백화점 매장 가격보다 싸야 하지만, 실제로는 면세점 가격이 더 높은 경우도 꽤 많다. 면세점 업계 관계자는 “대형 브랜드들은 채널별, 국가별로 가격 편차가 크지 않도록 가격을 철저히 통제한다”고 말했다.
명품, 가전은 공급사가 워낙 소수의 독과점 구조여서 유통업체가 건드리기엔 난공불락에 가깝다. 이마트는 ‘에브리데이 로우 프라이스(everyday low price, ELP)’ 실현을 위해 우선 농심 신라면을 정조준했다. ‘적장을 잡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항복하는 법’이라는 게 2000년대 중반경 이마트 경영진의 생각이었다. 당시 나온 게 오픈 프라이스(open price) 정책이었다.
말 그대로 유통사가 가격을 열어 놓고 마음대로 팔겠다는 것이다. 제조사가 정한 소위 소비자 권장가격을 고려치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마트는 손해를 보더라도 신라면을 업계 최저가로 판매함으로써 집객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이마트 등 대형마트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이마트의 실험은 얼마 안 가 무모한 도전으로 결론 났다. 농심은 자신의 가격 결정권이 무너지는 꼴을 두 눈 뜨고 당할 기업이 아니다. 이마트 전국 매장에서 신라면을 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급기야 이마트는 경쟁사인 코스트코에서 신라면을 사 오는 굴욕을 맛 봐야 했다.이후 이마트 등 할인점과 대형 식음료 제조사 간 관계는 평화와 공존으로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빅3’가 공급받는 신라면의 단가는 동일(납품단가 공개는 공정거래법상 위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조사의 판촉비 지출도 비슷하다. 농심의 경우 대형마트(할인점)에서 진행하는 판촉 행위를 외부 회사에 맡기고 이를 관리한다.
대형마트와 식음료 제조사 간의 동고동락은 의외의 효과를 발휘했다. 이마트는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e커머스의 가격 공세에 맞서기 위해 이를 십분 활용했다. G마켓, 11번가 등 오픈마켓에서 셀러들이 아무리 싸게 신라면을 팔아봐야 이마트 판매가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오픈마켓 판매상은 코스트코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떼와서 온라인에서 팔아야 하는 등 유통 단계를 하나 더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제조사의 대리점에서 오픈마켓에 물건이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래봐야 이마트보다 싸게 팔 수는 없었다.
이마트 등 대형마트가 제조사와의 공존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는 지난해 4월 명확하게 드러났다.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에 막 상장을 마친 후이던 4월 초 이마트는 2007년 폐지한 ‘최저가격 보상 적립제’라는 카드를 꺼냈다. 신라면, CJ햇반, 서울우유, 코카콜라, 삼다수 등 카테고리별 1위 상품을 비롯해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 칠성사이다, 새우깡, 케라시스 샴푸, 리스테린, 크리넥스 두루마리 휴지 등 가격 비교 상품 수는 500개에 달했다.
당시 이마트는 “쿠팡 가격보다 비싸면 차액을 보상해준다”고 선포했다. 이마트를 비롯해 대형마트 3사는 적어도 공산품에 관한 한 손해를 보지 않고도 쿠팡보다 싸게 팔 자신이 있었다. 제조사가 이마트에 넘기는 가격이 쿠팡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작년 상반기까지 쿠팡은 신라면 같은 1등 식음료 공산품 브랜드들을 손해를 감수하고 팔았다. 많이 팔면 팔수록 손해가 막심했다. 쿠팡은 농심에 대형마트 판촉비를 감안해서 공급가를 매겨달라고 읍소와 협박이 반반씩 섞인 요구를 끈질기게 해왔다. LG생활건강과는 아예 전면전을 불사했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은 쿠팡이란 ‘신생’ 유통업체를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해진 가격대로 대리점을 통해 물건을 받는 현 유통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상품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급기야 공정거래위원회까지 개입해 누가 공정거래 원칙을 어겼는지를 놓고 양사는 감정싸움을 거듭했다. 현재까지 LG생활건강의 화장품과 샴푸 등 유명 상품은 쿠팡에서 구하기 힘들다. 여담이지만, 면세점을 통한 중국 ‘대박’에 제동이 걸린 LG생활건강이 언제까지 쿠팡을 외면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도 지켜볼 일이다.
30여 년만에 판 바뀐 유통 패러다임
이런 흐름을 감안한다면, 마켓컬리의 농심 신라면 ‘최저가 도전’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컬리가 농심으로부터 얼마에 신라면을 공급받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컬리가 손해를 보고 신라면을 파는 상황은 아니다”라는 것이다.사실, 쿠팡은 작년 하반기 후반 무렵부터 주요 식음료 제조사들과 전쟁을 종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식음료 업계 관계자는 “농심이 신라면을 비롯해 생수 브랜드인 백산수 공급가를 대형마트와 거의 동일하게 쿠팡에 공급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쿠팡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에둘러 이렇게 표현했다. “식음료 제조사들과는 상생의 길을 걷고 있다”
식음료 제조사들로선 쿠팡, 컬리 등 e커머스 대표주자들의 바잉 파워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쿠팡은 지난해 184억637만달러(약 22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마트(SSG닷컴 포함해 약 18조원)를 처음으로 제쳤다. 마켓컬리의 매출도 지난해 1조5614억원에 달했다.
삼다수만 해도 LG생활건강이 유통을 맡았을 땐 쿠팡에 공급이 제한됐으나 광동제약으로 판매권이 넘어오면서 쿠팡 입점으로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농심으로선 백산수를 쿠팡에서 판매해야만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힘의 논리상 백산수를 팔려면 신라면, 새우깡이라는 대표 상품에서도 어느 정도 양보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신라면의 쿠팡, 컬리 최저가 판매는 이마트 등 대형마트의 생존과 관련해 일종의 임계점을 암시한다. e커머스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방어막이 뚫렸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새로운 경쟁 환경은 필연적으로 오프라인 유통 매장의 혁신을 가속할 것이다. 소비자로선 좋은 일이다. 방어막이 사라진 대형마트들은 신선 식품의 유통 단계를 더 줄여 질 좋은 프레시 상품을 매대 위에 올려놓을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마트 설립 30여 년 만에 새로운 유통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