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와 경제
미국중앙은행(Fed)의 최대 현안인 인플레와 관련해 총수요 관리를 중시하는 케인스언이 가져갈 수 있는 대책은 금리인상, 양적긴축 같은 긴축정책이다. 사진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스케치 / 연합뉴스
미국중앙은행(Fed)의 최대 현안인 인플레와 관련해 총수요 관리를 중시하는 케인스언이 가져갈 수 있는 대책은 금리인상, 양적긴축 같은 긴축정책이다. 사진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스케치 / 연합뉴스
올해 하반기 들어 길게는 글로벌 금융위기, 짧게는 코로나19 사태 대처 차원에서 추진됐던 저금리 정책의 숙취(hangover)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각국의 고민은 ‘고물가’와 ‘고부채’라는 제약 요건 속에 갈수록 침체국면에 빠져들고 있는 실물경기를 어떻게 끌어올리느냐 하는 점이다.

종전의 대응 방식으로는 3대 난제를 풀 수 없다. 인플레를 안정시키기 위해 ‘긴축’을 단행하다가는 고부채에 따른 원리금 상환 부담이 증가하고 실물경기는 더욱 침체된다. 반대로 실물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완화’를 고집할 경우 부채 절대 수준이 증가하고 인플레를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제3의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30년 전 각국이 지금 같은 상황에 봉착했을 때는 정보기술(IT) 산업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네트워크만 깔면 갈수록 공급 능력이 확대되는 이른바 ‘수확 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IT 산업이 발전되면 고성장하더라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골디락스 국면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플레 기대심리 차단 묘수 찾기
공급망 채찍효과로 인플레 증폭

하지만 최근 IT 산업은 2가지 새로운 현안을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기업 권력이 국가 권력을 넘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테크래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테크래시(techlash)란 ‘기술(technology)’과 ‘반발(backlash)’의 합성어로 각국 정부와 빅테크 기업 간에 힘을 겨루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쌍방향 의미의 용어다.

또 다른 하나는 IT 기업이 시장을 독점할 경우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국민 사이에 나타나는 ‘K’자형 양극화 구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빅테크’로 상징되는 IT 기업은 발전 정도에 따라 ‘횡재 효과’와 ‘상흔 효과’가 뚜렷이 나타나 소득 계층별로는 중산층이 무너져 중하위 계층, 즉 빈곤층이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재정정책 면에서는 페이고(pay-go), 간지언, 예비기금(rainy day fund) 같은 제3의 대안이 꾸준히 모색돼왔다. 하지만 통화정책 면에서는 제3의 대안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금리결정권을 지닌 미국중앙은행(Fed) 인사들의 학문적 토대를 보면 케인스언과 통화론자들이 적절히 안배돼 있다.

Fed의 최대 현안인 인플레와 관련해 총수요 관리를 중시하는 케인스언이 가져갈 수 있는 대책은 금리인상, 양적긴축 같은 긴축정책이다. 하지만 공급측 인플레 요인과 국가채무라는 제약 요건 속에 이 대책을 추진할 경우 인플레 안정 효과가 적은 대신 실물경기를 더 침체시킬 가능성이 크다.

합리적(혹은 적응적) 기대 가설에 따라 통화론자들이 인플레 대책은 기대심리를 차단하는 데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 러·우전쟁 등으로 증폭된 인플레 기대심리를 차단하지 못하면 임금과 인플레 간 악순환 고리가 형성돼 물가안정은 고사하고 고용 창출 목표까지 달성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인플레 기대심리를 차단하는 최선책은 통화정책의 생명인 ‘선제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더욱이 조기진단에 실패해 선제성을 잃은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금리를 올릴 때 초기에 대폭 끌어올려야 인플레 기대심리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 기대론자의 견해다. 지난 3월 이후 매 회의 때마다 Fed가 금리인상 폭을 한 단계씩 끌어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위기와 달리 이번처럼 인플레가 ‘경기순환’보다 ‘공급망 붕괴에 따른 비용 상승 요인’이 클 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분야의 석학인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의 요시 셰피 교수에 따르면 특정 사건(코로나19 지원금 등)을 계기로 소비가 증가할 경우 소매, 유통, 제조, 원자재 순으로 공급망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수급 간 불균형이 심화되는 이른바 ‘채찍효과(bullwhip effect)’가 나타나 인플레가 증폭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보자. 하루 100개의 라면을 팔고 5일분의 재고를 가져가는 소매상이 코로나19 지원금 지급으로 하루 판매량이 200개로 늘었다면 재고분 1000개를 맞추기 위해 800개를 더 주문해야 한다. 이때 하루 100개에서 800개로 주문이 늘어난 유통업체는 제조업체에 생산을 늘려줄 것을 독려하고 제조업체는 식자재 업체에 추가 생산에 필요한 재료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수급 불균형이 증폭돼 공급망이 붕괴된다는 것이 채찍효과의 골자다.

채찍효과가 총수요와 총공급 요인 간 악순환 고리의 주범이라면 인플레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은 역(逆)채찍효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금리인상을 빠르게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일단 역채찍 효과만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인플레가 의외로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은 각국 중앙은행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인플레 기대심리를 차단시키는 것이 실물경기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대론자들의 시각이다. 인플레 기대심리가 안정되면 기업은 임금 등 실질비용 개선, 국민은 실질소득 증대심리로 각각 설비투자와 소비를 늘려 침체국면에 빠지는 실물경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통화정책 측면에서 제3의 부양책이다.

실물경기 떠받치는 인플레 감축법

문제는 빅스텝 이상의 금리인상을 장기화하면 실물경기가 침체되고 완전고용 수준에 있는 실업률도 다시 높아지는 ‘희생률(sacrifice ratio)’이 커진다는 점이다. 두 분기 연속 역성장, 장단기 금리역전, 경기선행지수 하락 등 갈수록 실물경기 침체가 확인되는 시점에서 Fed가 빅스텝 이상의 금리인상을 계속 추진할 것인가도 결정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다행인 점은 Fed가 인플레 기대심리를 차단하는 과정에서 우려되는 실물경기 침체를 방지하기 위해 ‘인플레 감축법(IRA)’이 시행됐다는 것이다. 명칭은 인플레 감축법이지만, 실질적 내용은 바이든 정부의 경제 컨트롤타워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주장하는 현대공급중시경제학(Modern Supply-Side Economics, MSSE)의 일환이다.

MSSE의 논리는 이렇다. 최근처럼 금융완화에 따른 숙취와 공유경제라는 새로운 정책 목표를 지닌 상황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1980년대 초반의 레이거노믹스처럼 단순히 세율만 낮춰서는 안 되고, 이상기후 방지와 사회간접자본(SOC) 등 국가 인프라를 개조하는 공급 확대 정책을 추진해야 가능하다는 것이 옐런의 견해다.

‘미국 재건법’으로도 불리는 IRA는 앨버트 허시먼 교수가 주장하는 전후방 연관 효과가 커 단기적으로는 인플레를 잡으면서 중장기적으로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상기후 방지를 위한 각종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ESG의 중요성이 더 부각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