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시장에 풀린 상품권을 정가보다 싸게 구입해 값비싼 명품을 구매하는 ‘상테크’(상품권+테크)가 유행했다. 이게 상품권 할인 폭이 커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올해는 명품 수요도 작년에 비해 많이 감소해 상품권 가격 ‘방어선’이 약해진 것으로 풀이된다.
상품권 가격 일제히 하락
4일 서울 명동 등의 상품권 환전소에 따르면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의 지난달 상품권 매입 할인율은 각각 3.51%, 3.43%, 3.93%로 나타났다. 신세계백화점 10만원 상품권을 환전소에 판매하면 9만6570원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할인 폭이 커질수록 시세는 그만큼 떨어지는 셈이다.상품권 시세는 통상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을 전후로 상품권이 시장에 많이 풀리면 하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번 추석에는 지난 설날에 비해 시세 하락 폭이 컸다.
설 연휴가 끼어있던 지난 2월 신세계 상품권의 할인율은 3.28%였다. 같은 달 롯데 할인율은 3.34%, 현대는 3.40%로 집계됐다. 추석 기간 할인율이 설 때보다 0.2%포인트 더 높았다. 한 환전소 관계자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상품권이 대량으로 풀렸으나 수요가 따라오지 않아 할인 폭이 커졌다”고 말했다.
상품권 거래는 고물가, 고환율 등의 여파로 경제 상황이 악화함에 따라 예년에 비해 위축된 분위기다. 리셀(되팔기) 시장에서는 명품에 붙는 프리미엄이 축소돼 올해는 명품 열기가 작년만 못한 게 실상이다.
이에 따라 작년에 유행했던 상테크가 올해 들어 많이 약화한 것도 상품권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아직 불황이라는 표현을 쓰긴 이르지만, 소비자들이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 등에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받는 게 사실”이라며 “지금과 같은 추세가 장기화하면 허리띠를 더 세게 졸라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백화점 상품권 이외의 다른 상품권 가격도 약세를 보인다. 금융위원회로부터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받아 지난해부터 발행되는 이베스트투자증권의 주식상품권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상품권은 구입금액의 5%를 얹어줘 지난해 증시 활황기에 인기가 높았지만, 요즘은 글로벌 증시 급락 여파로 상품권 시장에서 거래가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이다.
상품권 난립 주의해야
신생 기업이 홍보 목적으로 발행했던 상품권의 인기도 줄고 있다. 금리 인상으로 기업경영에 어려움이 커지면서 제값을 못 받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상품권 할인율은 발행기업의 부실 가능성이 높고, 활용도가 떨어질수록 높아진다. 백화점 상품권 가운데 신세계 상품권의 시세가 가장 높은 것은 신세계, 이마트를 비롯해 호텔, 레저, 건강검진 등 사용처가 90여곳에 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금강제화와 같은 구두 상품권의 경우 사용처가 많지 않아 할인율이 30%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할인율이 10% 이상으로 높은 상품권의 경우 대량 구매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머지플러스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머지플러스는 ‘무제한 20% 할인’을 표방하며 머지포인트를 발행하다가 갑자기 사용처를 축소하고, 포인트 판매를 중단해 5000여명의 소비자가 피해를 봤다. 명동의 한 환전소 관계자는 “상품권 거래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1% 안팎 정도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10~20% 할인 판매하는 상품권은 구입하더라도 기업이나 기관 차원에서 대량 구매하는 건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