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단기 자금시장 경색에 대응해 주요 증권사를 대상으로 6조원 규모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입하기로 지난달 27일 결정했지만, 열흘가량 흐른 4일까지 RP 매입을 요청한 증권사는 한 곳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시장에서 하루짜리 RP 거래가 원활하게 이뤄지면서 유동성 경색이 시장 전체로 퍼진 상황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은은 지난달 27일 금융통화위원회 정기회의에서 메리츠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6개 증권사와 한국증권금융 등으로부터 총 6조원 규모의 14일물 RP를 매입하는 방안을 의결했다. 레고랜드발(發) 단기 자금시장 경색을 풀기 위한 방안으로, 이들로부터 RP를 사들여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막상 한은에 RP 매입을 요청한 증권사는 없었다. 한국증권금융 역시 마찬가지다. 한은 관계자는 “증권사는 만기가 최대한 짧은 것을 선호한다”며 “현재 1일물 RP 시장에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증권사의 자금 조달 통로 중 하나인 1일물 RP 시장은 이달 들어 안정화한 모습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만기가 하루인 1일물 RP 금리는 지난달 21일 연 3.26%까지 치솟았지만 정부와 한은의 유동성 대책으로 4일 기준금리(연 3%)보다 낮은 연 2.91%로 떨어졌다.

한편 금융위원회는 ‘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행사 거부’로 불거진 보험사 유동성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RP 매입 대상에 보험사를 추가하는 방안을 한은에 건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 의결 사항인 데다 실무 단계에서도 검토한 바 없다”고 밝혔다.

금융위 "보험사 RP도 매입해 달라"…한은은 부정적

한국은행에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요청한 증권사가 아직까지 없는 건 단기자금 조달 시장 불안이 다소 진정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은이 증권사의 RP 매입 방침을 밝힌 뒤 시장에서 은행권을 중심으로 증권사 RP 매입이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신용경색을 우려해 증권사에 자금 공급을 꺼린 은행이 한은 조치로 RP 매입에 나설 여유가 생긴 것이다. 4일 시장 관계자는 “한은 입장에서는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지 않고 정책 효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증권사들이 ‘낙인효과’를 우려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RP 매입을 요청할 경우 한은에 손을 벌릴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은이 수요예측을 잘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은의 RP 매입 대상은 자금 사정이 비교적 나은 대형 증권사 위주이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는 “한국증권금융이 중소형 증권사들의 은행 역할을 하고 있고, 증권금융 역시 RP 매입을 요청하지 않았다”며 “자금 사정이 악화할 수 있는 연말을 앞둔 만큼 상황을 계속해서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보험사도 RP 매입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흥국생명과 DB생명이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조기상환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채권시장 불안이 커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전날 보험업계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당국 차원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곧바로 발표했고 (RP 매입 등) 한은이 결정해야 할 사항은 공식적으로 건의했다”며 “한은이 RP 매입을 통해 단기 자금을 융통해준다면 보험사들이 ‘깔딱 고개’를 넘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일단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한은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 때도 보험사는 RP 매입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며 “해당 사안은 금융통화위원회 의결 사항인 데다가 보험사가 우선 시장에서 자금조달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조미현/이호기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