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 첫번째)이 지난 6월 ASML 본사를 방문해 피터 제닝크 대표(가운데)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 첫번째)이 지난 6월 ASML 본사를 방문해 피터 제닝크 대표(가운데)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회장, 경계현 사장 등 삼성전자 반도체사업 최고위 경영진이 유럽 출장 때마다 방문하는 업체가 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다. 이 회사는 반도체 미세공정의 필수 장비로 불리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다. 1년 생산 대수가 53대(올해 예상치) 수준으로 제한적인데 수요는 점점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인텔, 마이크론 등이 물량 확보전을 벌일 정도다. ASML이 반도체업계의 '슈퍼 을'로 불리는 이유다.

'슈퍼을' ASML CEO, 이 회장 취임 이후 첫 방한

ASML의 대표이사(CEO) 피터 베닝크가 방한한다. ASML코리아가 경기 화성에 조성하는 '반도체 클러스터' 기공식이 오는 16일 열리기 때문이다. ASML은 2025년까지 총 2400억원을 투자해 한국법인 본사를 확장하고 노광장비 트레이닝 센터, 재제조 센터, 체험 센터 등을 지을 계획이다. 기공식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임원들이 대거 참석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닝크 대표의 방한이 처음은 아니지만, 특히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지난달 27일 이재용 회장 취임 이후 한국을 찾는 세계 반도체장비업계의 거물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2020년 10월, 지난 6월 유럽 출장 때 ASML 본사를 방문해 베닝크 대표를 만났다. 이 회장이 방한한 베닝크 CEO와 만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산업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베닝크 대표를) 일부러 찾아가서도 만나는데, 한국에 왔으면 안 만나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ASML이 개발 중인 하이 NA EUV 장비
ASML이 개발 중인 하이 NA EUV 장비
최근 ASML 관련 업계의 관심사는 '하이 NA EUV'로 불리는 차세대 제품이다. 현재 활용되는 일반 EUV 노광장비는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다. 삼성전자가 7nm(나노미터, 10억분의 1m)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정에 가장 먼저 활용했다. 최근엔 14nm대 D램 공정에도 쓰인다.

반도체기업 명운 건 하이 NA EUV 확보전

하이 NA EUV는 일반 EUV 노광장비보다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 EUV가 웨어퍼에 여러 차례 회로를 새겨야 하는 반면 하이 NA EUV는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도체 생산의 시간과 비용을 단축할 수 있어 생산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2025년 출시 예정이고 가격도 일반 EUV(1500억~1900억원)의 3배 이상인 5000억원으로 추정된다. 벌써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인텔은 지난 1월 "하이 NA EUV를 반도체 업체 중에서 가장 먼저 활용할 수 있게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도 하이 NA EUV 장비를 주문했다. ASML은 지난 10월 실적설명회에서 "현재 EUV 장비를 활용하는 전 고객사가 하이 NA EUV도 주문했다"고 발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 네번째)와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오른쪽 두번째)이 지난 6월 네덜란드 ASML 본사를 반도체 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 네번째)와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오른쪽 두번째)이 지난 6월 네덜란드 ASML 본사를 반도체 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2025년께부터 삼성전자, 인텔, TSMC 등은 1nm대 공정에서 반도체를 양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D램 업체들도 현재 14nm보다 선폭이 좁은 10nm대 초반 D램을 생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초미세공정을 가능하게 하는 하이 NA EUV 장비가 없으면 반도체업체들의 기술 로드맵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재 일반 EUV 장비를 가장 많이 확보한 업체는 TSMC다. ASML이 그동안 생산한 EUV 노광장비의 절반 이상을 TSMC가 쓸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 NA EUV와 관련해선 판도가 바뀔 수 있을까. 삼성이 그동안 강조해온 이재용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시험대에 올랐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