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유엔에서 열린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세계 각국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의 중요성에 공감했고, 미국·일본·독일 등 글로벌 주요국은 탄소중립 달성을 선언했다. 한국도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전 세계는 앞다퉈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로드맵 발표에 착수했고, 지난 2021년 영국 글래스고에서 개최한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는 기존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함께 주요국은 2050 탄소중립 달성의 중간 연도인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 상향안을 발표했다. 한국은 기준연도(2018년) 대비 2030년 온실가스 감축치를 24.4%에서 40%로 상향했으며, 미국은 26~28%에서 50~52%(2005년 기준)로, EU는 40%에서 55%(1990년 기준)로 목표치를 상향했다.
EU·미국 중심의 보호주의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책으로 EU 집행위원회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을 선택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란 유럽연합(EU)이 규제 대상으로 삼은 수입 품목에 대해 온실가스 감축 비용을 부과하고, 역내 수입업자에게 인증서를 구입해 그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제도다. 기업들이 세금 회피와 비용 절감을 위해 탄소배출 규제가 느슨한 나라나 장소로 이동하는 탄소누출 방지를 위한 일종의 무역 제한 조치다.
2021년 7월, EU 집행위원회는 CBAM의 세부안이 담긴 ‘핏 포 55(Fit for 55)’를 발표했다. 초안 발표 당시 주요 골자는 5개 규제 대상 품목(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기)을 수입하는 자에 대해 연간 수입량에 해당하는 만큼 CBAM 인증서를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매 수량은 해당 품목의 직접 탄소배출량(스코프 1)에 비례하는 정도로 규정한다. 이후 2022년 6월, 초안의 규제 내용보다 강화된 내용의 유럽연합 의회 수정안이 통과됐다. 최종안은 EU 집행위원회, 각료이사회, 유럽의회 등 3자 협의를 통해 연내 확정될 예정이다. EU 집행위원회안에 따르면 내년 1월부터 3년간 시범운영이 시작되며, 이 기간에는 배출권 구매 의무는 없지만 관련 기업은 수출 시 제품별 탄소배출량을 보고해야 한다.
한편, 미국도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와 비슷한 내용의 탄소무역규제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6월, 미 상원은 미국식 탄소국경조정제도인 이른바 ‘청정경쟁법안(CCA)’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2024년부터 석유화학 제품 등 12개 수입품에 대해 온실가스 배출 1톤당 55달러를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유럽연합의 CBAM은 탄소배출권 가격으로, 미국의 CCA는 온실가스 무게를 기준으로 하는 차이는 있지만 결국 탄소배출량이 많은 국가의 수입품에 대해 불이익을 주겠다는 목표는 같은 셈이다. 탄소중립을 명분으로 주요 글로벌 국가들은 이제 이른바 ‘녹색보호주의’를 강화하려 하고 있으며, 수출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 산업과 기업에 피해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럽연합 수출 시 비용 문제 심각
한국무역협회에서 발표한 유럽연합 CBAM 품목 수출액을 보면 철강 26억6300만 달러, 알루미늄 1억8900만 달러, 비료 79만 달러 순으로 철강 품목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이에 국내 철강업계의 타격이 가장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직접적으로는 수입업자에 대한 인증서 비용이, 간접적으로는 인증서 비용으로 인한 수입업자의 수출단가 인하 및 이로 인한 수출 물량 감소가 우려된다. 일례로 철강 품목의 경우 전경련은 인증서 구매 비용 감면 등이 인정되지 않으면 구매 비용이 연간 339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장기적 관점에서 산업계 전체에 CBAM 도입으로 인해 발생할 비용적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미래연구원은 2030년을 기준으로 유럽연합의 CBAM 전면 도입 시 국내 산업계의 총부담액을 약 8조2456억 원 규모로 산출했으며, 이는 2030년 유럽연합 수출액 총액의 약 11.3%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추산했다. 규제 품목의 전·후방 상의 가치사슬을 고려하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업종은 더욱 많아지고, 또 향후 실제 규제 대상 품목 확대가 예상되기에 부담액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CBAM이 예정대로 시행된다면 수출·제조업이 국가 경제의 기반을 구성하는 한국은 미래 국가경쟁력 악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산업계와 경제계는 이러한 우려 속에서 정책입안자들의 CBAM 대응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유럽연합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제도가 시행될 가능성이 높기에 탄소국경조정제도라는 녹색보호주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저탄소시대의 국가경쟁력이 좌우될 것이다.
CBAM 면제국에 한국 포함해야
하지만 유럽연합의 CBAM 세부 방침에 대해 국내 기업이 이를 일일이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정부 차원에서 정보를 선제적으로 수집하고 경제계 의견을 수렴하면서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국과 유럽연합 모두 배출권 거래제의 유상 할당 비율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것으로 예정되는 만큼, 유럽연합 CBAM 면제국에 한국이 포함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민간 분야 역시 전 세계적 탄소중립 움직임에 맞춰 산업 분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개별 기업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현재 상황을 인식하고, 업종·규모별 협력 체계를 강화해 탄소중립 관련 이슈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역량이 부족한 중견·중소기업에 대해서도 안정적 공급망 관리 차원에서 대기업의 적극적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다. 개별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정부와 민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한다.
지난 9월, 태풍 ‘힌남노’는 포스코의 모든 용광로를 꺼뜨렸다. 기후 위기는 이제 기후 재해라고 불릴 만큼 코앞에 닥친 상황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탄소중립으로의 발걸음은 피할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 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한국은 미래 새로운 시장의 선도자가 될 수도, 혹은 리더를 따라가는 후발주자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성장동력의 기로에서 정책입안자와 민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김준호 전국경제인연합회 ESG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