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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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출 4000억원대 중견 가전업체 W사는 지난 9월부터 직원 월급을 주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무급휴직까지 권장하고 나섰다. 소비 심리 위축으로 제품이 팔리지 않고, 재고가 쌓여 공장 가동도 중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전언이다. 이 같은 경영난은 W사만의 얘기가 아니다. 가전업계 곳곳에서 “전례 없는 위기가 찾아왔다”는 비명이 쏟아지고 있다.

역대급 경영난…“월급 줄 돈 없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W사는 최근 임직원을 대상으로 무급휴가를 신청받거나 권고 사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경영난으로 인한 구조조정이다. 실적 악화가 예상보다 심각해 현재 상태로는 정상 경영이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이 회사 직원들은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 급여를 받지 못했다. 당장 오는 25일 월급날에도 지급 가능성이 불투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사 측은 월급 일부라도 지급하겠다며 은행에 대출을 알아보고 있지만, 이마저도 고금리 탓에 쉽지 않은 분위기다. 이미 이 회사 직원 수는 지난해 말보다 약 40% 줄었다. 회사 내부에선 ‘역대급 경영난’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올해 순손실만 1000억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공장 가동도 사실상 멈춘 상태로 알려졌다. W사 관계자는 “제품이 팔리지 않아 창고에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재고자산을 털어내지 못해 현금흐름이 정체되고, 공장 가동률마저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

곳곳서 희망퇴직·비상경영 선언

가전업계에선 ‘W사 사태’를 두고 “남 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가전에 몰렸던 ‘반짝’ 수요가 사라진 데다 경기 침체로 소비가 급감하면서 경영 사정이 전반적으로 악화했다는 전언이다. 이 와중에 글로벌 공급망 악화로 가전 주요 원재료인 강판과 구리 평균 가격이 지난해보다 각각 21.3%, 42.3% 올랐다. 제조 원가가 오른 탓에 가격을 낮춰 파는 ‘재고떨이’도 여의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가전 ‘대들보’로 꼽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재고 관리에 연일 허덕이는 분위기다. 삼성전자는 최근 생활가전, 스마트폰 등을 아우르는 DX(디바이스경험)부문에 대해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삼성전자, LG전자 모두 가전 공장 평균 가동률을 지난해 말보다 낮췄다. 급기야 LG전자 가전 유통채널인 ‘하이프라자’는 최근 희망퇴직을 시행하고 나섰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00명 안팎으로 희망퇴직을 추진한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다.

SK매직, 신일전자 등 소형가전 업체도 막대한 재고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전해졌다. SK매직의 재고자산은 지난해 말 599억원에서 올해 3분기 809억원으로 급증했다. 선풍기로 유명한 신일전자의 재고자산도 같은 기간 254억원에서 428억원으로 70%가량 증가했다.

각 기업에선 대부분 공장 가동률을 낮추고 생산을 줄이면서 재고 축소에 집중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재고자산 증가는 자금 흐름 악화로 이어지는 ‘위기 경보’나 마찬가지”라며 “내년 신규 투자나 고용계획을 짜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위기가 이른 시일 내 잦아들긴 어려울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가전업계 고위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시장 흐름은 올해보다 나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며 “대기업은 어떻게든 버틴다고 해도, 자금 여력이 부족한 중소업체는 생존이 걱정되는 위기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