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명시(絶命詩)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어갈꼬.


* 성삼문(成三問, 1418~1456) : 조선 전기 문신,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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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속에 절명시를 읽다
폭설 속에 절명시를 읽다

성삼문의 절명시는 서늘하면서 뜻이 깊고 여운도 깁니다. 알다시피 그는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목숨 바쳐 신의를 지킨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죠. 어릴 때부터 문재가 뛰어났고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유배 중인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번이나 찾아가 음운(音韻)을 배워오기도 했지요. 그렇게 연구를 주도하며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운명은 기구했지요.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든 그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김질의 밀고로 붙잡혀 참수됐습니다. 온 집안이 멸족의 참화를 당했죠. 이 과정에서 평생의 벗이었던 신숙주와 정인지 등은 세조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사슬에 묶인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를 ‘진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부르며 나무라고 “새 정권의 녹봉은 먹지 않고 별도로 놔두었으니 다시 가져가라”고 호통쳤지요. 고개를 주억거리고 서 있는 신숙주에게도 선왕의 신신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꾸짖었습니다.

‘절명시’는 그가 처형을 당하러 가면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본디 제목은 없지만, 후세 사람들이 절명시라고 이름을 붙였지요. 형장의 북소리가 둥둥 울리는 첫 행은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음산한 풍경을 보여줍니다. 해가 서산으로 막 넘어가는 일몰의 시간을 통해서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지요.

이 쓸쓸하고 황량한 생의 말미에서 그는 왜 황천길의 주막을 떠올렸을까요? 아마도 이 허망한 세상의 끝을 지나 저승까지 이어지는 길을 또 다른 삶의 여정으로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육과 정쟁의 회오리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은 그에게는 역설적이게도 삶과 죽음의 세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연결된 것이었죠. 죽기 전 옛 동료들에게 “너희는 어진 임금을 만나 태평성대를 만들라. 나는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고 한 충절의 뿌리도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그러니 현세의 영달도 후세의 명리도 그에겐 한낱 껍데기에 불과했겠죠. 형이 집행된 뒤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은 고스란히 쌓여 있었고,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는 거적자리만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패관잡기』의 편자인 어숙권(魚叔權)이 『금헌휘언(今獻彙言)』을 인용하며 “명나라의 손궤(孫蕢)라는 인물이 남옥(藍玉)의 옥사 때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쓴 시”라고 했다는 것인데, 앞부분 한자들은 상당히 다르고 뒷부분 2행만 비슷하군요. 생육신인 남효온(南孝溫)이 『육신전(六臣傳)』을 남기면서 이 시가 성삼문의 것이라고 주석을 단 데서 논란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삼문의 절의(絶義)는 변함없지요. 그가 남긴 시조에도 그 전형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오죽하면 매화와 대나무의 강직한 군자 기질을 좋아해 매죽헌(梅竹軒)이라고 호를 지었던 그가 죽어서는 한 그루 키 큰 소나무로 독야청청하겠다고 했을까요.

시인의 언어는 자신의 운명을 담는 성배라고 했는데, 죽음으로 완성한 그의 절명시야말로 가장 슬픈 몸짓으로 빚은 비애의 성배가 아닌가 싶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