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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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치솟는 물가를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업들을 압박하고 나서자 식품업체들이 잇달아 제품 가격 인상 계획을 철회하거나 보류하고 있다. 생수, 소주, 고추장, 된장 등 서민 생활과 밀접한 품목이 대상이다. 일각에선 정부가 과도하게 시장 가격에 개입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풀무원 등 인상 ‘없던 일로’

27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풀무원은 다음달 초로 예정됐던 ‘풀무원샘물’과 ‘풀무원샘물 워터루틴’의 가격 인상 방안을 전격 철회했다. 풀무원은 해당 제품의 출고가를 평균 5% 인상할 예정이었다. 풀무원 관계자는 “물가 상승에 소비자 부담이 커지는 것을 감안해 내부 회의를 거쳐 가격을 올리지 않기로 했다”며 “인상 계획 철회 공문을 유통 업체에 보냈다”고 말했다.

식품업계에선 풀무원의 이번 결정에 정부의 강력한 가격 인상 자제 압박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물가 안정을 위한 고강도 대응을 지시했다.

이후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당국자들이 금융·통신·정유·식품 분야에 연달아 개입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풀무원이 한국식품산업협회 회장사를 맡은 만큼 관계 당국 기류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생수 가격 인상 요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제주개발공사는 1일 ‘제주삼다수’ 출고가를 평균 9.8% 올렸다. 당시 제주개발공사는 물류비, 병 제조비용 등이 급격히 오른 것을 인상 요인으로 제시했다.

다른 식품업체와 주류업체들도 직·간접적으로 정부 압박을 받고 있다. 한 식품업체는 고추장, 된장 등 장류 가격을 올리는 방안을 검토해 오다가 인상안을 잠정 보류하기로 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서민 생활과 연관이 깊은 장류, 식용유, 분유 등의 가격 인상 계획이 최근 철회되거나 보류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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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트진로는 이날 “소주값을 인상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기재부와 국세청이 주류업체 실태조사에 들어간다고 알려진 지 하루 만이다. 정부는 소주값 실태조사와 더불어 소주업계의 이익구조, 직원 성과급 현황 등까지 파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플레 화살 기업에 돌리나”

업계에선 “정부가 물가 억제를 명목으로 관성적 기업 팔 비틀기에 나섰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난방비 폭탄과 공공요금 줄인상에서 비롯된 여론의 불만을 애먼 기업에 돌리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올해 물가 상승의 주범은 난방비를 비롯한 공공요금”이라며 “민간 기업은 직원과 주주들의 이익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원가 상승 부담을 가격에 아예 반영하지 않으면 배임이 될 수 있다”고 하소연했다.

정부가 수시로 기업인을 소집해 물가 안정에 협조하라고 요구하는 구태를 중단해야 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물가 관련 간담회는 암묵적인 가격규제”라며 “정부 요청에 협조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준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기업 이익을 침해하고 주주의 이익을 훼손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수정/한경제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