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을 미리 앞당겨 받는 조기 수령자가 80만 명을 넘었다.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에서 한 가입자가 상담받고 있다.  /최혁 기자
국민연금을 미리 앞당겨 받는 조기 수령자가 80만 명을 넘었다.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에서 한 가입자가 상담받고 있다. /최혁 기자
올해 만 61세인 한모씨는 이달부터 국민연금을 앞당겨 받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한씨는 63세가 되는 2025년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연금을 일찍 받으면 감액되는 불이익이 있지만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하루라도 젊을 때 노후를 즐기기 위해 조기 수령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수령액이 깎이는 페널티를 감수하고 수급 시기를 앞당기는 조기 수령자가 80만 명을 돌파했다. 조기 수령 제도가 도입된 1999년 후 최대 규모다.

"은퇴 후 벌이 없다" 국민연금 조기수령 80만명 넘어
9일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 국민연금 조기 수령자는 80만413명으로 집계됐다. 작년 말(75만5302명)보다 4만5111명 늘었다. 넉 달 만에 작년 한 해 동안 늘어난 조기 수령자 수(4만9671명)에 근접했다. 올 들어서도 지난 1월 76만4281명에서 2월 77만7954명, 3월 79만371명으로 매달 증가했다.

국민연금은 수급 개시 연령보다 최대 5년 앞당겨 받을 수 있다. 1년 일찍 받을 때마다 수급액이 연 6%씩 깎인다. 즉 5년을 먼저 받는다면 최대 30%를 손해 본다. 조기 연금이 ‘손해연금’으로 불리는 이유다. 지난 4월 기준 조기 연금을 받는 수급자의 평균 수령액은 월 65만4963원이었다.

조기 수령자가 늘어난 원인으로는 우선 올해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62세에서 63세로 늦춰진 점이 꼽힌다. 예컨대 올해 62세인 사람은 작년 기준대로라면 올해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금 수급 시기가 1년 뒤로 밀리면서 그때까지 기다리기 어려운 이들 가운데 조기 신청자가 늘었다는 분석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수급 연령이 늦춰진 2013년과 2018년 조기 연금 신청자는 전년 대비 각각 5912명(7.5%), 6875명(18.7%) 늘었다.

은퇴 후 연금 수령 때까지의 소득 공백기를 메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은 법적 정년이 60세인 데 반해 현재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원칙적으로 63세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2033년까지 단계적으로 65세까지 높아진다. 정년을 채우더라도 3~5년의 ‘소득 크레바스(공백기)’가 생기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 관계자는 “한국과 달리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은 연금 가입 연령에 상한이 없거나 수급 개시 연령보다 가입 상한 연령이 높아 소득 크레바스가 없다”고 말했다.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조기 연금을 신청하는 경우도 있다. 직장에 다니는 자녀의 피부양자로 등록해 건보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소득 기준이 작년 9월부터 연 3400만원 이하에서 연 2000만원 이하로 강화됐다. 즉 연금을 포함한 월 소득이 167만원 이상인 사람은 지역가입자로 전환돼 ‘건보료 폭탄’을 맞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연금을 합쳐 연 소득이 2000만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이 조기 연금을 신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건보료 납부를 피하기 위해 조기 연금을 신청하는 건 근시안적이란 지적도 있다. 국민연금은 사적연금과 달리 수령액이 매년 물가상승률에 연동된다. 이 때문에 언젠가는 연금 지급액이 높아져 피부양자 자격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조기 연금을 받는 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공단 관계자도 “건강상 이유로 조기 연금을 신청하는 게 유리한 사람도 있지만 평균 수명 자체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에 감액되는 조기 연금보다는 정상 수령하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고 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