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사진=왓차
박찬욱 감독/사진=왓차
"전 평범한 사람입니다."

인터뷰를 마칠 때 꺼낸 박찬욱 감독의 자기 평가는 충격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찬욱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 중 한 명이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로 감독상을 휩쓸었고, 2004년 영화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2009년 영화 '박쥐'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거머쥐었고, 2016년 선보인 영화 '아가씨'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까지 받았다. 국내에선 박찬욱 감독의 이력을 따라잡는 연출자를 꼽는 것이 어려울 정도다.

탄탄한 서사와 강렬한 색감의 미쟝센으로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작품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지만, '설국영화' 제작, '무뢰한' 기획, '비밀은 없다' 각본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새로운 도전도 멈추지 않는다. 니콜 키드먼, 매튜 구드, 미와 와시코브스카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 '스토커'를 내놓았고,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역시 영국에서 제작해 BBC에서 방송됐다.

"전 평범해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래서 새로운 걸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편안하게 안주하는 삶에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요. 영국에서, 미국에서 일할 때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생각도 들고, '지금 여기가 어딘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삶을 계속하는 건 저의 개인 생활이 단조롭고 평범하기 때문인 거 같아요. 자극적인 작품을 만들고요."
박찬욱 감독/사진=왓차
박찬욱 감독/사진=왓차
박찬욱 감독이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연출을 결심한 이유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원작 소설을 보면서 영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고, 영화보다는 긴 시간이 필요했기에 드라마라는 표현법을 택하게 됐다. '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을 배경으로 이스라엘 정보국 비밀 작전에 연루돼 스파이가 된 배우 찰리와 그녀를 둘러싼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다. 장르의 특성상 영상으로 표현했을 때 더 재미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작품을 선보이는 방식, 표출 플랫폼도 바뀌었다. 그럼에도 박찬욱 감독은 "드라마 연출을 결정할 땐 고민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영국 극장에서 에피소드 2편을 상영했을 때 '현타'가 오긴 했다"면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솔직하게 전했다.

"런던에서 상영회를 했던 극장이 정말 좋은 곳이긴 했어요. 화면도 크고, 사운드도 좋았죠. 드라마를 하면서도 기획, 각색, 각본과 촬영, 후반 작업까지 영화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어요. 화면이 작아졌다고 해서 클로즈업을 더 하거나, 후반 작업에 신경을 덜 쓰거나 하지 않았죠. 큰 상영관에서 보니 '그래, 이게 영화지' 싶었어요. 후반 작업을 그렇게 섬세하게 만진 이유가 이런 곳에서 보라고 그런 건데, TV를 다시 하긴 힘들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상영 플랫폼으로 왓챠플레이가 결정됐을 때 '이벤트성으로라도 꼭 극장에서 상영을 해 달라'고 사정을 했어요. 더 완성도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어서 감독판도 작업하고요."
박찬욱 감독/사진=왓차
박찬욱 감독/사진=왓차
그럼에도 드라마만의 작업 방식에 매력이 있다고 전했다. 박찬욱 감독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의 이야기를 6회로 나누고, 각각의 엔딩을 구성하는 과정이 재밌었다"며 "제가 TV를 또 하게 된다면, 이 엔딩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제작사, 방송사와 이견도 있었다. 이를 타협하고 조율해가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는 게 박찬욱 감독이 꼽은 드라마 작업의 가장 어려운 지점이었다. 아직도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중심 소재로 다루는 만큼 양측의 미묘한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큰 과업 중 하나였다.

이 와중에 매주 17시간씩 각본 회의를 하고, 직접 콘티를 짜고, 촬영을 진행했다. 그동안의 고된 시간을 보여주듯 박찬욱 감독의 머리는 백발에 가깝게 하얗게 센 모습이다.

"머리는 집안의 피가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체력적으로 힘들긴 했어요. 마지막 촬영을 할 때까지 각본도 계속 작가들과 고쳤어요. 대본과 촬영까진 전권을 받았는데, 편집에서 의견 차이가 있었어요. 프로덕션이나 방송국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자기 의견이 있는 거잖아요. 이게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완전하게 의견 조율이 안 되더라고요. '스토커'는 의견차이가 더 컸지만, 함께 합의점을 도출하면서 스튜디오와 제가 다 만족했는데, 이번엔 시간이 부족해서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감독판이 나온 거고요."

이번에 공개되는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은 박찬욱 감독의 욕심을 모두 담았다. 박찬욱 감독은 "크게 보면 달라진 게 거의 없지만, 보다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무엇보다 "특별한 감정이 있는 한국 관객들에게 이 작품을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강조했다.

"'리틀 드러머 걸'은 영국 BBC와 미국 AMC 등 영미권에서는 이미 공개가 된 작품이에요.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플랫폼으로 한국에서 선보이게 된 거잖아요. 최상의 버전을 보여드리고 싶었고, 그래서 이렇게 인터뷰나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죠."
황석희 번역가와 박찬욱 감독/사진=왓챠
황석희 번역가와 박찬욱 감독/사진=왓챠
'리틀 드러머 걸' 초판 각본을 한국어로 쓴 건 박찬욱 감독이지만 한국어 자막은 전문 번역가 황석희가 맡았다. 자막 작업의 경우 번역가에게 대본을 맡긴 후 손을 놓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박찬욱 감독은 황석희 번역가와 함께 "대본을 새로 쓴다는 마음으로" 자막을 만들었다. 황석희 작가는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 인증샷을 SNS에 공개하면서 "한 편을 검토하는 데에만 5~6시간이 걸렸다"면서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전 영어를 잘하진 못하지만, 이 작품은 제가 한국말로 써서, 영어로 번역하고, 그걸 영국의 작가들이 유려하게 손을 봤어요. 이 대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저라서 함께하게 됐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걸 한국어 뉘앙스에 맞춰 표현하긴 쉽지 않은데, 즐거웠던 작업이었어요."

스타 감독인 만큼 이미 여러 프로젝트가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으로 언급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은 "아직 정해진 건 없다"면서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특히 미국 서부극 스릴러 '브리건즈 오브 래틀버지' 연출에 대해선 "투자 확정이 안됐다"며 "언급에 어려움이 있다"고 전했다.

한편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은 29일 왓챠플레이를 통해 전편 공개된다. 또한 채널A를 통해 매주 금요일 밤 11시에 방송판이 방영될 예정이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inf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