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의 기업 경영 개입을 위한 절차와 수단을 담은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지침)’을 경영계와 충분한 협의 없이 강행 처리하려고 해 거센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모호한 규정을 무더기로 담고 있어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무소불위식으로 간섭할 빌미를 줄 것이란 경영계 우려에 의결을 한 차례 연기한 지 한 달 만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나서 “재계가 막연한 불안감을 갖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가이드라인 구체화는 별로 이뤄지지 않았고 일부 조항은 오히려 원안보다 개악됐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17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이날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 위원들을 대상으로 비공개 간담회를 열었다. 오는 27일 예정된 기금위를 앞두고 지난달 의결을 유보했던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의 정부 수정안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기금위가 27일로 예정돼 있는 만큼 사실상 정부의 ‘최종안’이다.

이번 가이드라인 수정안은 재계와 노동계 등 각계의 의견을 일부 반영했다. 국민연금이 주주제안을 할 때 고려할 사안으로 시장에 대한 상징적 의미, 실효성(통과가능성) 외에 ‘기업의 여건이나 산업별 특성’을 추가했다. 기업·산업별로 배당, 지배구조, 임원 보수가 다를 수밖에 없는 점을 감안해 달라는 재계의 의견을 반영한 조치다.

국민연금의 무소불위 경영개입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있는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도 일부 개선이 이뤄졌다. 원안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가 급락하면 국민연금이 곧바로 경영 개입을 할 수 있도록 했지만, 수정안엔 ‘중점관리기업’으로 선정해 1년 단위로 비공개 대화, 비공개 중점관리기업(블랙리스트) 선정, 공개 중점관리기업 선정 등 절차를 단계적으로 밟기로 했다.

하지만 경영계에선 “국민연금이 경영 개입을 할 수 있는 중점관리대상 기업 선정과 예상치 못한 우려 사안에 대한 구체화가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기업들은 국민연금이 주주제안 방식으로 경영 개입을 할 수 있는 배당부실, 과도한 임원 보수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수정안엔 이런 내용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 중 ESG 평가 급락 외에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 권익을 침해할 우려가 발생한 경우’에는 원안처럼 중간 단계 없이 곧바로 주주제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도 마찬가지다. 정부나 국민연금이 원하면 맘대로 경영 개입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초안에선 예시를 통해 국민연금이 주주제안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했지만, 수정안에선 이를 전면 삭제하고 ‘상법 및 자본시장법에서 허용하고 있는 적절한 주주제안 등 추진’이라고 달랑 한 줄로 간소화했다.

일부 조항은 원안에 비해 개악됐다. 원안에선 1년 단위로 돼 있던 주주권 행사의 단계별 추진 기간을 기금위나 수탁자책임위원회 의결이 있으면 단축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노동계 요구 사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보건복지부가 지금처럼 졸속으로 마련된 가이드라인을 강행 통과시키면 두고두고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며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보다 깊은 논의를 거친 뒤 의결하고 시행 시기도 일정 유예기간을 둬 혼란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환/이상열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