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투자 '간판'들, 운용 일선서 물러나…가치투자 세대교체 본격화하나
가치투자자의 세대교체가 본격화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가치투자자로 일컬어지는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등이 투자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1세대 가치투자자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후계자 양성에 나섰다는 의견과 투자 스타일 변화가 필요해진 시대 상황을 반영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후계자 양성 나선 1세대

1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존 리 대표는 지난 1월 말 그간 운용하던 펀드를 모두 다른 매니저에게 넘겼다. 지난해 12월 이채원 대표도 최고투자책임자(CIO) 직책을 내려놨다.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 강방천 에셋플러스 회장 등과 함께 대표적인 가치투자자로 꼽혔던 이들이다. 존 리 대표는 “후계자 양성을 위한 것”이라며 “같은 철학을 공유하는 매니저가 운용하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가치투자 개념을 들여와 일가를 이룬 1세대의 퇴장이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 가치투자 열풍을 타고 부상했다. 외환위기 이후 주가가 폭락해 싼 주식이 사방에 널려 있을 때였다. 주가수익비율(PER: 주가/주당순이익), 주가순자산비율(PBR: 주가/주당순자산) 등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 중심으로 저평가된 중소형주에 투자했다. 펀드 수익률은 시장을 크게 앞섰다. 이채원 대표가 운용하는 10년투자펀드는 설정 이후 10년 수익률이 157%에 달했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상승률(41%)을 네 배 가까이 넘어섰다.

2017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반도체 등 대형주 랠리에서 소외되며 수익률은 곤두박질쳤다. 가치투자의 위기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한 펀드매니저는 “1세대의 퇴장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투자 철학은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장에 적응할 수 있는 젊은 매니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평가했다.

변화에 적응한 2세대

1세대가 키운 2세대 가치투자자들이 시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를 운용하는 최웅필 KB자산운용 상무, 남영구 KB자산운용 팀장, 정보기술(IT) 종목에 강점을 가진 정성한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센터장 등이 대표적이다. 강대권 유경PSG CIO, 박인희 씨앗자산운용 부사장, 이건규 르네상스자산운용 대표, 최광욱 J&J자산운용 대표 등도 2세대 가치투자자로 꼽힌다.

이들은 전통적인 가치주뿐 아니라 성장 가능성이 있는 회사에도 투자한다. 이건규 르네상스자산운용 대표는 “1세대 투자의 중심이 됐던 벤자민 그레이엄(자산 관점)과 워런 버핏(비즈니스 모델 중시) 방식에서 벗어났다”며 “성장성에 비중을 두고 정보기술(IT), 바이오 등 업종에 대한 편견이 없는 것도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저성장이 일상화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치투자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강대권 유경PSG CIO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 둔화가 이어지면서 경기 순환에 따라 저평가 주식이 다시 오르는 기회가 오지 않고 있다”며 “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투자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