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 전. 일본이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그 파장에 업계는 긴장했다. 생산 차질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당시 한 중소기업인은 삼성전자의 책임도 있다고 했다. “매년 수십조원 이익을 내면서 이 정도 핵심 소재도 국산화하지 않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 말을 삼성 임원에게 전했다. 그는 반발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던 상황이 있었지만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 것 같다”고 했다. 얼마 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 협력사에 일본산을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SOS’를 쳤다.

국내 협력사들은 준비가 돼 있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적극 지원했다. 1년이 안 돼 일본산을 대체할 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시장은 이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협력사 주가가 많게는 두 배까지 올랐다. ‘기술독립’에 앞장서는 기업에 투자하는 펀드도 높은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국산화 속도 내는 기업들

일본 모리타화학공업, 스텔라케미파 등 불화수소 전문 화학기업들은 100년 된 기업이다. 그 노하우로 생산하는 불화수소를 국내 기업들이 국산화하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SK머티리얼즈는 지난 17일 경북 영주 공장에서 초고순도(99.999%) 불화수소가스 양산을 시작했다. 반도체용 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새기고, 필요 없는 부분을 씻어내는 이 제품은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재료다. 작년 7월 일본 정부가 한국 수출 규제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국내 업체는 없었다.

SK머티리얼즈는 발빠르게 대응했다. 6개월 만에 제품을 개발하고 영주에 생산 공장을 지었다. 이후 샘플 테스트를 거쳐 이달부터 본격적으로 반도체 공장에 납품을 시작했다. SK머티리얼즈 관계자는 “가스형 고순도 불화수소 국산화율을 0%에서 70%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일본 업체들의 수출량은 30%가량 줄었다. SK머티리얼즈 주가는 1년 전과 비교해 26% 올랐다.

협력사들은 성장

다음달 1일이면 일본 정부가 한국 수출을 제한한 지 1년이 된다. 규제 품목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수적인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감광액),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이 포함됐다. 한국 대기업들은 소재 수급처 다변화를 위해 쉴 새 없이 뛰었다. 국내 협력사들은 훌쩍 자랐다. 해외에 100% 의존하던 제품을 속속 국산화했다. 이들 기업의 시가총액은 두 배로 커졌다.

동진쎄미켐도 그중 하나다. 포토레지스트를 만드는 업체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를 인쇄하는 노광 공정에 필요하다. 이 회사는 3차원(3D) 낸드를 만드는 데 필요한 KrF(불화크립톤) 포토레지스트 분야에선 시장 점유율 1위다. 2010년 D램 등에 사용되는 ArF(불화아르곤) 포토레지스트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그러나 일본 JSR, TOK 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여전히 회사 전체 매출에서 ArF 포토레지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5%대에 불과하지만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동진쎄미켐은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라인에서 사용하는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국산화에도 나서고 있다. 아직 국산화가 안 된 품목이다. 동진쎄미켐 외에 이엔에프테크놀로지도 개발을 진행 중이다.

“새로운 사이클 맞을 것”

시장은 이들 소재 부품 기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정부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데다 삼성전자 등이 증설에 나서면서 수요도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6월 말 1만50원이던 동진쎄미켐 주가는 최근 3만원을 터치하기도 했다. 이엔에프테크놀로지 주가도 1년 전과 비교해 67% 올랐다. SK머티리얼즈와 마찬가지로 고순도 불화수소를 국산화한 솔브레인홀딩스 주가도 1년 새 94% 뛰었다.

관련 펀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지난해 8월 설정된 뒤 ‘애국 펀드’ ‘극일(克日) 펀드’로 불린 ‘NH아문디 필승코리아 주식형펀드’ 수익률도 선방했다.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에 투자하는 상품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5000만원을 투자해 관심을 받았다. 지난 26일 기준 이 펀드의 설정 후 수익률은 31.02%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에스앤에스텍, 덕산네오룩스, SK머티리얼즈, 동진쎄미켐 등에 투자해 수익을 냈다.

국산화에 성공한 기업들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 진출해 더 높은 가치를 평가받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최영산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과의 경합도가 높은 제품은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판매될 것”이라며 “이들 국내 소재 기업 주가는 단순히 반도체 업황을 따라가던 과거와는 다른 사이클을 맞게 됐다”고 평가했다.

국내 반도체 소재 기업의 올해 주가수익비율(PER)은 10배 수준이지만, 기술 국산화에 성공하면 JSR, TOK 등 일본 소재 업체들의 PER(약 25배)을 추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