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 오창과학산업단지에 있는 에코프로비엠 본사 /사진=에코프로비엠
충북 청주 오창과학산업단지에 있는 에코프로비엠 본사 /사진=에코프로비엠
2차전지 핵심소재인 양극재를 생산하는 에코프로비엠이 10조원대 대규모 계약을 성사시켰다. 에코프로그룹은 물론 2차전지 소재주의 계약을 통틀어 역대 최대 규모다. 중견기업이 10조원대 공급계약을 하는 건 업계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국내 2차전지 소재 업체들의 높은 기술력과 생산 능력을 재확인시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장기 실적을 현 주가에 반영하는 2차전지주 특성상 기존보다 주가 상승 여력도 커질 전망이다.

코스닥시장 시가총액 2위 기업 에코프로비엠은 올해로 창립 24주년을 맞는 회사다. 10평 사무실에서 시작해 글로벌 시장의 강자로 자리잡고 있다는 평가다.

◆10조 잭팟 계약

9일 오전 에코프로비엠은 SK이노베이션과 10조1102억원 규모의 전기차용 하이니켈 양극재 판매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계약 기간은 2024년부터 2026년말까지 3년간이다. 이날 주식시장 개장전 공시가 나온 뒤 에코프로비엠은 장중 40만원(18.80%)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
당초 에코프로비엠은 양극재 시장의 높은 성장성을 이유로 2024년 매출 가이던스를 8조원대로 제시해왔다. 하지만 이번 계약으로 2024년은 물론 2026년까지의 매출 전망치가 전반적으로 올랐다.

◆수주 비결은

양극재는 배터리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소재다. 원가 비중도 가장 높은 소재다. 2차전지 내에서 에너지를 저장·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배터리의 성능 뿐 아니라 안정성도 양극재 영향이 크다. 양극재의 에너지 밀도를 높이기 위해 금속 계열인 니켈 함유량을 높인 양극재를 하이니켈양극재라 한다. 문제는 니켈 비중이 커지면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양극재는 크게 다섯가지로 나뉘는데, 그 중에서도 니켈코발트망간(NCM)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재다. 전자제품부터 에너지저장장치(ESS)까지 사용처가 넓다. 니켈코발트알루미늄(NCA)가 그다음이다. 전기차 시대에서는 NCA가 대세다. 에너지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밀도는 높으면서 안정적인 하이니켈 양극재, NCA를 생산하는 게 각 회사의 핵심 기술이다. 기존에는 일본의 스미토모가 NCA 양극재 강자였다. 테슬라 공급량이 많았다. 2019년 기준 시장점유율은 42.6%. 에코프로비엠은 16.7%이었다. 이 차이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번 공시를 통해 2024년 이후 1위가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서는 스미토모사와 에코프로비엠의 양극재의 기술력 차이는 없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빠르게 증가하는 배터리 수요에 얼마나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다. 생산능력 확충 속도의 문제란 얘기다. 에코프로비엠이 이번에 SK이노베이션과 장기공급계약을 맺게 된 배경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높은 기술력과 그룹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한 생산능력이다.

◆23년 성장사보니

에코프로비엠은 2016년 에코프로의 2차전지 사업부문이 떨어져 나와 설립됐다. 2019년 3월 5일 코스닥시장에 상장했다. 당시 공모가는 4만8000원이었다.

에코프로의 역사를 보면 에코프로비엠의 기업 성장 비결을 엿볼 수 있다. 에코프로는 1998년 10월 22일 창업주인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이 서울 서초동 골목에 자리한 4층 건물 10평짜리 단칸 사무실에서 창립했다. 상업고를 졸업해 은행원과 삼성전자 사원을 거쳐 공인회계사까지 승승장구하던 그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6년 수출입 사업으로 창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지 2년만이다.

직원은 이 회장과 이전 사업에서 함께한 여직원(현재 최선미 에코프로 이노베이션 경영지원팀장), 단 두명이었다. 그가 환경기업을 창업하게 된 계기는 1997년 우연히 보게된 '교토의정서' 체결 소식이었다. 이동채 회장은 '지구 온난화는 우리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함께 공유할 문제다. 앞으로 더 심각해질 수 있으니 관련 사업이라면 성공 가능성이 높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도 2차 감축기간(2013년~2018년)에는 감축대상국에 편입될 테니 관련 투자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성장 산업이라는 게 그 당시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처음 이름은 '코리아제우륨'이었다. 국책연구기관과 기업 연구소 등에서 활용하는 제올라이트(흡착성이 뛰어나 불순물 제거와 탈취, 나노과학을 위한 촉매연구에 쓰이는 소재)를 국산화하기 위해 매달렸다. 2001년엔 사명을 에코프로로 바꿨다. 2002년 1월에는 반도체 제조 공정시 클린룸으로 유입되는 유해 화학성분을 흡착해 제거하는 '케미컬필터'를 국산화했다. 이 사업 부문이 지금의 에코프로에이치엔이다.

환경기업으로 자리매김은 했지만 가시적인 매출 성과를 거두는데 한계가 있었다. 경영상 어려움이 따랐다. 성장가능성이 있지만, 지금 당장 먹거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 회장은 당시 제일모직으로부터 전해액 유기용매(유기물질로 이루어진 다른 물질을 녹이는 물질)사업을 제의받았는데 이를 계기로 2차전지 소재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화학기술에 기반을 둔 벤처기업 성격을 띤 에코프로는 전해질 유기용매 생산에 즉각적으로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에는 제일모직과 '초고용량 양극활물질 공동개발’에 나섰다. 양극재 사업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전구체에 집중했다. 전구체는 양극소재를 합성하기 전 단계의 중간 제품이자 양극소재의 성능, 가격, 품질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물질이다. 2004년 처음 전구체 개발에 나설 당시 전체 직원 수는 30명이 채 안됐다.

여기서 에코프로는 미래를 좌지우지할 결정을 내린다. NCA소재 전구체 연구개발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NCA소재 전구체는 당시로선 공정이 까다롭고 연구개발이 어려워 업체들이 꺼리던 분야다. 전기자동차 시대를 내다보고 현재보단 미래를 위한 투자에 나섰다. 1년만인 2015년 12월 양극활물질 전구체 설비를 준공했다. 이듬해 1월부턴 시험 생산도 가능했다.

제일모직은 에코프로에 양극활물질 개발 제의를 했다. 그리곤 에코프로는 관련기술 및 사업권 일체를 인수받았다. 그게 2007년 4월이다. 제일모직은 대기업이 사업을 영위하기에 매출 규모가 적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없다고 판단했었다. 이 과정에서 에코프로는 삼성SDI에 대한 영업권도 가져왔다.

이후 2008년 1월 니켈계 양극소재 40톤과 전구체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가 준공됐고, 3월에는 양극소재 제1공장까지 문을 열었다. 2차전지 소재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수익을 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걸렸다. 권우석 에코프로비엠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수익을 못 내고 투자만 해야 했던 10년여의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다"고 했다.

◆향후 주가 전망은

2016년 998억원이던 매출은 5년만인 올해 1조3000억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2024년에는 8조원대 혹은 그 이상의 매출을 낼 전망이다.

주가는 실적 안정성이 높을수록 먼 미래의 실적을 현 주가에 반영하는 특성이 있다. 현재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수준)인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 50배선에서 좀 더 상향 조정될 가능성이 열렸단 얘기다.

윤혁진 SK증권 연구원은 "2024년부터 배터리 수요가 급증하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공장 증설이 이어질 것"이라며 "소재 업체들의 장기공급 계약은 안정적으로 실적 전망을 가능하게끔 하기 때문에 밸류에이션 상승의 핵심 요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