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에 ‘갑질’한 혐의를 받는 미국 브로드컴의 자진시정안(동의의결안)을 기각하면서 본격적인 제재 절차에 들어간다. 브로드컴이 낸 자진시정안이 피해보상에 미흡하다고 보고 위법 여부와 제재 수위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공정위가 제재 결정을 내리면 삼성전자는 브로드컴을 대상으로 수천억원대 피해배상 소송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브로드컴 피해보상 미흡”

"브로드컴, 삼성에 수천억 피해 주고 200억 상생안…개선의지 없어"
브로드컴은 구매 주문 승인을 하지 않거나 부품 선적을 중단하는 방법을 통해 삼성전자를 상대로 스마트기기 부품 공급에 관한 장기계약(LTA) 체결을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 LTA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간 브로드컴의 스마트기기 부품을 매년 7억6000만달러어치 이상 구매하고, 실제 구매금액이 그에 미달하는 경우 차액을 보상해야 했다.

공정위는 앞서 미국 통신칩 제조사인 퀄컴의 신고를 받고 2019년부터 브로드컴의 혐의를 조사했다. 지난해 1월엔 제재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 격)를 발송했다. 공정위 조사가 시작되자 브로드컴은 지난해 7월 동의의결을 신청했고 이후 공정위는 브로드컴이 낸 동의의결안에 대한 심사 절차를 개시했다. 당시 공정위는 브로드컴 측이 제시한 자진시정안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브로드컴이 삼성전자가 본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시정 방안을 개선할 의지가 있다고 보고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했다.

브로드컴은 경쟁질서 회복 방안으로 △부품 공급계약 체결 강제 금지 △부품 선택권 제한 금지 △컴플라이언스 시스템 구축을 제시했다. 또 거래질서 개선 방안으로 △반도체·정보기술(IT) 상생기금 200억원 조성 △삼성전자에 대한 부품 공급 및 기술지원 관련 약속을 내놨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 같은 시정 방안이 삼성전자가 입은 3600억원 상당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다며 반발했다. 브로드컴과 경쟁관계인 퀄컴 역시 브로드컴의 위법성에 대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향후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며 동의의결안 기각을 촉구했다.

공정위도 브로드컴이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삼성전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익을 침해한 만큼 삼성전자에 대한 피해보상이 충분해야만 동의의결이 가능하다고 봤다. 이에 공정위는 브로드컴 측에 피해보상·기술지원 확대 등을 제안했지만 브로드컴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정위가 동의의결안을 기각한 이유다. 동의의결을 위해선 ‘거래질서 회복’이나 ‘다른 사업자 보호’가 충분히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공정위는 “동의의결 개시 신청 심사 때와 달리 브로드컴 측은 삼성전자에 대한 피해보상 확대를 수용할 수 없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며 “최종 시정방안이 동의의결 개시 결정 당시 평가한 브로드컴의 개선·보완 의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해 동의의결을 기각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한기정 공정위원장이 올해 업무계획 등을 통해 반도체 부품 기업의 독점력 남용에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힌 점도 이번 동의의결 기각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 민사소송 나설 듯

동의의결안이 기각됨에 따라 공정위는 이른 시일 안에 전원회의를 열어 브로드컴의 법 위반 여부와 제재 수준을 결정할 방침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연말까지는 결론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브로드컴의 위법 혐의가 인정될 경우 공정위는 200억원 안팎의 과징금을 부과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공정거래법상 ‘거래상 지위 남용’으로 브로드컴에 매길 수 있는 최대 과징금이다.

산업계에선 삼성전자가 공정위의 정식 제재 이후 브로드컴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브로드컴 제품 의무 구매와 재고 증가 등으로 인한 피해를 구제받을 길은 민사소송밖에 없어서다. 공정위가 브로드컴에 대해 거래상 지위 남용 판정을 내릴 경우 삼성전자는 민사소송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공정위가 의미 있는 결정을 했다”며 “공정위 의결 결과를 보고 대응 방안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기/황정수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