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실패'에서 배운다] (5) '평준화 교육의 한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헬무트 콜 전 총리는 독일의 대학을 '휴가공원(Freizeit Park)'이라고 비꼬았다.
학업을 마치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 놀이터 같다는 지적이었다.
2003년 초여름.
기자가 만난 독일인들중 상당수는 대학생들을 '게으름뱅이'라고 불렀다.
'직업이 학생'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대학은 물론 박사학위까지 정부가 교육비 일체를 부담하다 보니 학생들이 졸업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마냥 학교에 눌러앉아 있다는 비난이었다.
다름슈타트 공과대학인 테크니쉐(Technische)대학 1학년에 재학중인 최부훈씨.
그가 지난 학기에 대학에 낸 돈은 1백20유로(약15만원)가 전부였다.
두달치 지하철 패스를 살 정도의 돈.
그는 학생증 하나로 시내버스는 물론 지하철인 우반, 교외지역을 다니는 기차를 모두 공짜로 이용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생활보조금까지 주고 있다.
월 1백유로(13만5천원)에서 5백유로(67만5천원)까지 빌려주며 나중에 지원금의 절반만 무이자로 갚으면 되는 조건.
최씨는 "학생의 70% 정도가 지원금을 받고 있고 상당수는 그돈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티나 부르스터 독일 상공회의소 교육담당위원은 "독일 대학생의 평균 졸업나이는 28세로 영국 프랑스보다 평균 6년 이상 길다"며 "30세가 넘은 대학생들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독일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최소 5년 이상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4년제 대학교와 단순 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4∼5년 이상 차이가 난다.
그 결과는 대학을 학생증을 가진 무직자 천국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사회민주당 정부가 1975년 교육제도를 대폭 개편하면서 내걸었던 슬로건은 '교육기회의 평등'이었다.
학생들을 시험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환경교육을 강화하며 무료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대학진학이 쉽도록 각종 제도를 뜯어고쳤다.
그러나 당초 취지와는 다른 결과들이 나타났다.
학생들은 게을러졌고 학력은 떨어졌다.
우선 학력 저하 문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난 2000년 국제학력평가(PISA)를 실시한 결과 독일은 32개국 가운데 21위에 그쳤다.
라이너 게오르크 릴링 프랑크푸르트시 교원노조 위원장조차 "창의력과 이해력 위주로 수학과 독해 능력을 테스트했는데 한국 일본 영국 미국 등에 모두 뒤졌다"며 "교원노조 내에서도 논란이 많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독일인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학 평준화가 초래한 허다한 문제들이 여기에 맞물려 있다.
독일대학은 지역우선 선발권을 주기 때문에 전국적인 입시경쟁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미국의 '하버드'나 'MIT'같은 세계적인 대학이 없다.
교육평등을 기치로 내걸었던 사민당이 집권한 베스트팔렌주 등의 학업성적은 더욱 낮아졌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은 오전 수업만 하고 있다.
수업은 오전 7시45분에 시작돼 6교시로 진행된다.
만 9세 독일 학생의 연간 수업시간은 7백52시간으로 OECD 평균에 비해 10% 정도 모자란다.
14세 학생도 수업시간이 3% 정도 적다.
에크하르트 이밍 아우구스티너슐레 프리드레르크 김나지움 교장은 "경쟁력 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학사와 석사 제도를 도입하고 김나지움에서 전일(全日)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1∼13학년 학생들(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는 수업시간을 늘릴 계획"이라며 "13년제 독일식 교육제도를 12년제로 단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학 교수들의 경쟁력도 문제가 되고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노벨상 수상자들이 대학마다 즐비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박종화 주(駐)독일 한국대사관 교육관은 "우수한 독일출신 학자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독일에서는 박사학위를 마친 뒤 뛰어난 연구실적을 쌓더라도 정교수가 되려면 6년 이상 걸리는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과정을 별도로 이수해야 한다.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더라도 이 과정을 이수하지 않으면 정교수로 임명되지 않는다.
일부 대학들은 주니어 교수제와 학ㆍ석사 제도를 도입하는 등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사회분배 차원에서도 독일 교육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가난한 학생들은 대부분 중등교육 단계에서 직업학교로 간다.
김나지움을 거쳐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ㆍ상류층이다.
상류계층 자녀의 김나지움 진학비율은 노동계층 자녀의 6∼10배에 달하고 있다.
국가가 부자학생들을 위해 보조금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OECD는 최근 발간한 독일경제 보고서에서 "독일은 다른 회원국들보다 중등 교육에서 1.6배의 교육비를 투자하고도 성과가 매우 나빴다.
대학도 성과가 매우 저조했다"고 평가했다.
'교육기회 평등'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있는 독일식 평등화 교육이야말로 독일경제의 걸림돌이었다.
특별취재반=김호영ㆍ현승윤ㆍ안재석ㆍ김병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