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켈리 고어텍스 CEO, 과장·부장·사장도 없는 회사…"모든 직원을 리더로 만들어라"
미국 델라웨어주에 있는 한 회사 회의실. 한편에는 ‘많은 직원이 따르는 사람이 곧 리더’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가 놓여 있다. 회의 개시 직전인 듯 10여명이 탁자에 둘러앉기 시작했다. ‘테리 켈리’라는 이름표를 부착한 한 여성이 가장 늦게 회의실에 들어왔다. 서류를 내려놓은 그는 간단하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어색한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최근에 배운 춤인 듯했다. 회의실 곳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됐다.

방송을 통해 전해진 한 기업의 일상적 회의 광경이다. 회사의 이름은 ‘윌버트 리 고어 어소시에이트(이하 고어)’. ‘세상을 바꾼 101가지 발명품(영국 인디펜던스), ‘제2의 피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고어텍스 섬유를 개발한 회사다. 춤을 춘 테리 켈리는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다. 아침 회의 분위기가 자칫 딱딱해질 수 있다며 몸치이지만 춤을 췄다고 얘기했다. 직원들이 서로의 의견을 가감없이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켈리는 2005년 CEO에 올랐다. 그는 고어의 상식을 깨는 경영 원칙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CEO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어 특유의 ‘3무(無직위·無직책·無큰 조직)’라는 전통을 지켜내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수평적 리더십 전통 계승

고어텍스에는 직위가 없다. 한국식으로 하면 대리, 과장, 부장은 물론 사장도 없다. 직책도 없다. 명함에는 이름과 고어어소시에이트라는 회사 이름만 찍힌다.

그러나 켈리가 CEO에 오른 직후 큰 문제에 부딪혔다. 일부 직원이 그동안 유지해온 서열이 없는 회사의 전통에 문제를 제기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다른 회사와 같이 조직의 상하 구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본질적으로는 명확한 기준이 없는 급여 책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고어텍스에서 임금은 별도의 규정 없이 동료들의 평가에 따라 결정됐다. 이에 대한 반대는 회사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1980년대 말부터 제기돼 왔다.

2000년대 중반 미국 경제에는 본격적으로 거품이 끼고 있었다. 기업들도 높은 임금을 앞세워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켈리는 고민에 빠졌다. 인재를 잡아두기 위해 전통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켈리는 그러나 전통을 고수하기로 했다. 수평적 구조가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오히려 수평적 평가를 더욱 확대했다. 기존 10명 안팎이던 한 직원에 대한 평가자 수를 직원당 20~30명으로 늘렸다. 기준도 바꾸지 않았다. ‘얼마나 회사에 기여했는가’라는 포괄적인 가이드라인만 있을 뿐이다.

“직급에 따른 획일적 기준보다는 거미줄 같은 교차 평가라는 혼돈 속에서 모든 직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켈리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상하 구분 없이 많은 사람이 평가해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직원들은 이내 이를 받아들였다. 사태는 마무리됐고 걱정했던 직원들의 이직도 없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켈리가 CEO에 오른 뒤 회사를 그만둔 직원 비율은 5%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켈리의 과감한 결정은 회사의 좋은 전통을 스스로의 신념으로 만들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켈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산을 미리 책정하는 ‘기업의 상식’도 혁파했다. 회사가 급변하는 경제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예산은 자칫 동료들이 변화하는 기업환경에 실시간 대처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노린 것은 신속한 투자였다. 예산의 유연성은 투자가 필요할 때 신속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고어를 지원했다. 켈리가 CEO에 오른 뒤 고어는 매년 7~9% 성장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흑자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유연한 대응 덕분이었다는 게 언론의 평가다.

켈리는 “기업환경이란 변동성이 심해 틀에 갇혀 있으면 쉽게 해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리더는 카오스에 익숙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혼돈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신뢰가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는 “빌 고어 (고어텍스) 창립자도 동료 간 상호신뢰가 제품 개발과 회사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모두를 리더로 만들어주는 리더

올해 48세인 켈리는 미국 델라웨어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델라웨어주는 고어가 위치한 곳이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고어에 입사해 군용 섬유소재 사업 부문에서 일을 시작했다. 입사 10년 뒤 글로벌 섬유사업 책임자가 됐다. 섬유소재 사업 전반을 맡은 뒤 중국에 첫 번째 아시아 공장을 지었다.

이때 생산공장을 건설하면서 연구·개발 및 판매담당 건물도 같이 짓기로 결정했다. 회사 전반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게 하는 ‘삼각의자 원칙(three-legged stool)’을 도입한 것이다. 제품과 관련한 모든 부서가 한 산업단지에 있어야 모든 직원이 자신의 업무 분야뿐 아니라 회사의 운영 전반을 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는 몇 년 뒤 직원들의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최근 고어 내부 조사 결과 전체 직원 중 60% 이상이 자신이 리더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답했다.

‘삼각의자 원칙’도 고어의 전통 위에 세워졌다. 고어는 설립 이후 개발 생산 영업 등의 업무영역을 단순한 부서로 구분하지 않았다. 대부분 프로젝트 위주로 업무를 진행했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직원들은 또 다른 분야로 옮겨갈 수 있다. 현재 고어의 주력 사업은 크게 섬유, 의료, 전자, 산업재 등 4개 분야다. 각 분야에 필요한 전문지식이 다르지만 직원들이 사업부 간에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켈리는 각 사업 부문의 규모는 최대 250명을 넘지 않는다는 원칙도 고수했다. 직원 간 소통과 회사에 대한 소속감을 위해 사업장이 200~250명을 넘으면 무조건 나눈다. 조직을 통합하고 키우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켈리는 비용보다 소통을 중시하는 회사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혁신의 유산’을 충실히 계승하다

테리 켈리 고어텍스 CEO, 과장·부장·사장도 없는 회사…"모든 직원을 리더로 만들어라"
켈리 경영의 키워드는 ‘전통 계승과 혁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기반은 고어라는 회사가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CEO도 투표로 뽑는다. 창업자인 빌 고어는 “리더들은 영업 목표를 앞당겨 달성하는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 경험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했다. 켈리도 이런 과정을 통해 CEO가 됐고, 수평적 소통의 구조를 더 평평하게 만들었다.

고어의 정식 명칭인 ‘윌버트 리 고어와 동료들(W. L. Gore & associate)’에도 회사가 지향하는 문화가 함축돼 있다. 창업 때부터 상사와 부하 직원이 모여 있는 회사가 아니라, 동료가 모인 조직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상사는 없지만 ‘스폰서’라는 멘토 제도를 두고 있다. 신입사원들은 스폰서의 도움을 받아 최적의 근무지를 정한다. 켈리의 CEO 직함도 법률상 필요에 의해서 존재할 뿐이다.

경영학 구루 게리 해멀은 이런 수평적 조직을 기존의 계층구조와 대비해 ‘창살(lattice)구조’로 규정했다. 그는 “창살구조에 기반을 둔 조직은 상하 권위적 연결이 아닌 조직 전원이 전방위적 연결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이런 기업문화 덕에 고어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하는 ‘일하고 싶은 직장’에 매년 선정되고 있다.

정성택 기자 naiv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