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아베 우경화' 직면한 새 일왕…평화노선 이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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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와 시대' 맞는 일본의 앞날은
지난주 일왕부부 이세신궁 방문
각지서 6만명 인파 몰리는 등
日 전역 축제 분위기로 '들썩'
지난주 일왕부부 이세신궁 방문
각지서 6만명 인파 몰리는 등
日 전역 축제 분위기로 '들썩'
지난 18일 일본 도쿄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일왕 거주지역 고쿄(皇居·궁궐) 내 왕실자료관인 산노마루쇼조칸에는 평일임에도 적잖은 방문객이 줄을 지어 입장했다. 올 2월부터 21일까지 열린 ‘아키히토(明仁) 일왕 즉위 30년·일왕 부부 결혼 60년 특별전’ 관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 사람들이다. 관람객들은 1989년 아키히토 일왕 즉위식 당시의 사진 등을 오랫동안 세심하게 살펴봤다.
고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이 이달 말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와 다음달 1일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의 즉위를 앞두고 축제 분위기다. 주요 도시 상점가 등에서는 새 일왕 즉위와 함께 사용될 연호인 ‘레이와(令和)’를 내건 마케팅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만간 역사 속으로 퇴장할 ‘헤이세이(平成)’ 연호를 활용한 ‘추억팔이’도 한창이다.
‘레이와 시대’ 앞두고 축제 분위기
최근 일본 언론에서 아키히토 일왕을 비롯한 일본 왕실의 일정이 메인 뉴스로 관심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는 지난 17일부터 3일간 일정으로 미에현 이세시의 이세신궁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넘겨줄 ‘삼종신기(三種神器·역대 일왕에게 전해지는 거울과 칼, 곡옥)’를 꺼내는 행사를 치렀다. 아사히신문은 “(아키히토 일왕) 최후의 지방 방문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6만 명 넘게 이세신궁 주변에 운집했다”고 전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달엔 나라현을 방문해 초대 일왕으로 알려진 진무(神武) 일왕릉을 방문했고, 이번주에는 아버지인 쇼와(昭和) 일왕 묘를 방문할 예정이다.
1818년 이후 200여 년 만의 일왕 생전 퇴위를 계기로 일본 왕실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지고 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왕실에 친밀감을 느낀다’는 비율은 올 4월 조사에서 76%를 기록해 1959년 여론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임 쇼와 일왕 시절 ‘친밀도’가 40%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국민의 호감도가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일왕 부부에 대한 국민적 호감이 높은 것은 꾸준히 평화 메시지를 앞세운 영향이 크다. 아키히토 일왕은 1989년 즉위 후 2차 세계대전 당시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중국과 필리핀 등 과거 침략전쟁을 했던 국가를 방문해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과 관련해서도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때는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발언했고,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방일 때는 “일본이 한반도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고, 그에 대한 슬픔은 항상 기억에 남아 있다”고 사과했다. 2005년 사이판을 방문했을 때는 태평양전쟁 때 숨진 한국인을 기리는 한국인 희생자 추념탑을 예고 없이 방문하기도 했다.
몸을 낮춰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행보를 한 점도 한몫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는 피난 주민들과 무릎을 꿇고 대화하기도 했다. 재위 기간 거품경제 붕괴와 동일본대지진 등 ‘시련’이 많았지만 이 같은 행보 덕에 일본 국민의 뇌리에 일왕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가 각인됐다.
새 일왕, 우경화에 이용되나 관심
2012년 말 집권 이후 정치·외교 측면에서 우경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이 다음달 새 일왕 즉위를 계기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아키히토 일왕 시절에는 평화를 강조하는 일왕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표방한 아베 정권 간에 불편한 동거가 지속됐다. 따라서 새 일왕이 즉위하는 것을 기회 삼아 왕실에 보수 정권의 ‘입김’이 강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베 정권 주도로 이뤄진 새 연호 및 새 화폐 도안 발표다. ‘레이와’라는 새 연호의 출전을 중국 고전이 아니라 일본 고전 ‘만요슈(萬葉集)’로 삼고, 연호에 ‘명령하다’는 의미가 담긴 ‘영(令)’자와 전쟁 경험이 얽힌 쇼와시대가 연상되면서 일본을 지칭하기도 하는 ‘화(和)’자가 사용된 데에는 일본의 국민적 자긍심을 고양하려는 아베 총리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니치신문은 “‘레이와’라는 연호에 대해 아베 정권 지지층은 81%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비지지층은 55%만 우호적으로 보는 등 호감도에서도 온도차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이례적으로 5년 뒤에 사용될 화폐 도안을 미리 공개하면서 화폐 모델을 현 정권 입맛에 맞는 제국주의 시대 인물로만 갖춘 것에 대해서도 잡음이 일고 있다.
따라서 차기 일왕이 이 같은 우경화 움직임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관심이다. 정치적 실권은 없더라도 새 일왕이 우경화 움직임에 동참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아베 정권의 우향우 행보에 속도가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일왕이 국수주의적 움직임에 제동을 걸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관측이다.
일본 내 보수 세력이 아키히토 일왕처럼 ‘평화 지향’ 성향을 내비친 나루히토 왕세자에 대한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점도 부담이다. 그동안 나루히토 왕세자는 튀지 않는 조용한 행보를 보여왔다. 2015년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의 비참한 체험과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한 정도가 ‘정치적 성향’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다.
제프 킹스턴 템플대 도쿄캠퍼스 교수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줄고 있고 동아시아 국가 간 긴장은 높아지는 상황에서 나루히토 차기 일왕이 우경화 압력을 견뎌내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
고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이 이달 말 아키히토 일왕의 퇴위와 다음달 1일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의 즉위를 앞두고 축제 분위기다. 주요 도시 상점가 등에서는 새 일왕 즉위와 함께 사용될 연호인 ‘레이와(令和)’를 내건 마케팅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만간 역사 속으로 퇴장할 ‘헤이세이(平成)’ 연호를 활용한 ‘추억팔이’도 한창이다.
‘레이와 시대’ 앞두고 축제 분위기
최근 일본 언론에서 아키히토 일왕을 비롯한 일본 왕실의 일정이 메인 뉴스로 관심있게 다뤄지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 부부는 지난 17일부터 3일간 일정으로 미에현 이세시의 이세신궁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넘겨줄 ‘삼종신기(三種神器·역대 일왕에게 전해지는 거울과 칼, 곡옥)’를 꺼내는 행사를 치렀다. 아사히신문은 “(아키히토 일왕) 최후의 지방 방문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6만 명 넘게 이세신궁 주변에 운집했다”고 전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달엔 나라현을 방문해 초대 일왕으로 알려진 진무(神武) 일왕릉을 방문했고, 이번주에는 아버지인 쇼와(昭和) 일왕 묘를 방문할 예정이다.
1818년 이후 200여 년 만의 일왕 생전 퇴위를 계기로 일본 왕실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지고 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왕실에 친밀감을 느낀다’는 비율은 올 4월 조사에서 76%를 기록해 1959년 여론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임 쇼와 일왕 시절 ‘친밀도’가 40%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국민의 호감도가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일왕 부부에 대한 국민적 호감이 높은 것은 꾸준히 평화 메시지를 앞세운 영향이 크다. 아키히토 일왕은 1989년 즉위 후 2차 세계대전 당시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중국과 필리핀 등 과거 침략전쟁을 했던 국가를 방문해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과 관련해서도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때는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발언했고,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방일 때는 “일본이 한반도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고, 그에 대한 슬픔은 항상 기억에 남아 있다”고 사과했다. 2005년 사이판을 방문했을 때는 태평양전쟁 때 숨진 한국인을 기리는 한국인 희생자 추념탑을 예고 없이 방문하기도 했다.
몸을 낮춰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행보를 한 점도 한몫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는 피난 주민들과 무릎을 꿇고 대화하기도 했다. 재위 기간 거품경제 붕괴와 동일본대지진 등 ‘시련’이 많았지만 이 같은 행보 덕에 일본 국민의 뇌리에 일왕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가 각인됐다.
새 일왕, 우경화에 이용되나 관심
2012년 말 집권 이후 정치·외교 측면에서 우경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이 다음달 새 일왕 즉위를 계기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아키히토 일왕 시절에는 평화를 강조하는 일왕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표방한 아베 정권 간에 불편한 동거가 지속됐다. 따라서 새 일왕이 즉위하는 것을 기회 삼아 왕실에 보수 정권의 ‘입김’이 강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베 정권 주도로 이뤄진 새 연호 및 새 화폐 도안 발표다. ‘레이와’라는 새 연호의 출전을 중국 고전이 아니라 일본 고전 ‘만요슈(萬葉集)’로 삼고, 연호에 ‘명령하다’는 의미가 담긴 ‘영(令)’자와 전쟁 경험이 얽힌 쇼와시대가 연상되면서 일본을 지칭하기도 하는 ‘화(和)’자가 사용된 데에는 일본의 국민적 자긍심을 고양하려는 아베 총리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니치신문은 “‘레이와’라는 연호에 대해 아베 정권 지지층은 81%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비지지층은 55%만 우호적으로 보는 등 호감도에서도 온도차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이례적으로 5년 뒤에 사용될 화폐 도안을 미리 공개하면서 화폐 모델을 현 정권 입맛에 맞는 제국주의 시대 인물로만 갖춘 것에 대해서도 잡음이 일고 있다.
따라서 차기 일왕이 이 같은 우경화 움직임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관심이다. 정치적 실권은 없더라도 새 일왕이 우경화 움직임에 동참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아베 정권의 우향우 행보에 속도가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일왕이 국수주의적 움직임에 제동을 걸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관측이다.
일본 내 보수 세력이 아키히토 일왕처럼 ‘평화 지향’ 성향을 내비친 나루히토 왕세자에 대한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점도 부담이다. 그동안 나루히토 왕세자는 튀지 않는 조용한 행보를 보여왔다. 2015년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의 비참한 체험과 일본이 걸어온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한 정도가 ‘정치적 성향’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다.
제프 킹스턴 템플대 도쿄캠퍼스 교수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줄고 있고 동아시아 국가 간 긴장은 높아지는 상황에서 나루히토 차기 일왕이 우경화 압력을 견뎌내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