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떠나더라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자유무역 질서를 수호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진단이 나왔다. 미국 달러는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것으로 관측됐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는 27일 이 같은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가 새 리더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채텀하우스는 미국이 국제무역과 통화 부문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서로 충돌하다가 이제는 양립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고 분석했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통화 패권을 지키려면 경상수지 적자를 감수해야 하지만 통상 부문의 패권을 위해서는 적자를 용납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는 설명이다.

채텀하우스는 미국이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쪽으로 나아갔다고 진단했다. 예컨대 트럼프 행정부는 다자무역 체제인 세계무역기구(WTO)에서 항소기구의 판사 임명을 거부해 항소기구의 기능에 위협을 가했다. 다자 간 자유무역협정의 하나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오랜 참여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예 불참을 선언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개정하고 일본, 유럽연합(EU) 등과도 자국에 유리한 합의를 끌어내려 하고 있다.

채텀하우스는 “트럼프 행정부가 다자무역 체제에 대한 불만을 극단으로 몰고 갔으나 이는 새로운 게 아니라 속도를 더한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앞으로 출범할 미국 행정부가 (트럼프 행정부보다) 덜할지는 몰라도 미국이 과거 역할을 재개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고 했다.

이 연구소는 미국이 통화 부문에서는 앞으로도 통제력을 행사할 것으로 관측했다. 채텀하우스는 “최근 미국의 정치적 불확실성 때문에 달러화를 대체하려는 중국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오랜 욕구가 힘을 받았다”며 “하지만 이들 통화는 내부 약점 때문에 더 광범위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평했다. “여러 개의 기축통화로 다극 체제를 운용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달러화는 네트워크 효과(사용자가 많아 가치가 커지는 현상) 등으로 패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연구소는 “미국 정부가 변덕스러운 정책을 이어간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달러화가 언젠가는 현재의 지위를 상실할 위험도 존재한다”고 했다.

심은지 기자 summ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