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로 이름났던 중동의 ‘석유 왕국’ 사우디아라비아가 확 바뀌고 있다. 일상생활부터 기업 환경까지 곳곳에 있던 제한 규정이 풀렸다. 요즘 사우디에선 여성이 자동차를 운전하고 남성 보호자 없이도 자유롭게 여행을 다닌다. 극장에서 대중 영화를 상영하고, 거리에선 음악 공연이 벌어진다. 증권시장에선 외국투자자가 상장사에 지분 제한 없이 투자할 수 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볼 수 없던 일이다.

사우디는 왕실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주도로 사회·문화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경제적으론 석유에 크게 의존하는 체질을 바꾸고, 민간의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작업도 하고 있다.
脫석유 나선 사우디…'사막의 실리콘밸리'에 5000억弗 투입
전방위 개방·개혁 나선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는 부왕세자이던 2016년 4월 사우디 국가개혁 프로젝트 ‘비전 2030’을 발표했다. 국내총생산(GDP) 중 민간 부문 비중을 기존 40%에서 2030년까지 65%로 늘리는 게 목표다. 내년까지는 비정부 부문 일자리를 45만 개 창출하고 기존 12.5%인 실업률을 9%로 낮출 계획이다. 이를 위해 내세운 목표 항목이 346개, 계획 중인 이니셔티브는 543개에 달한다.

사우디는 비전 2030을 통해 그간 각 분야에서 굳게 닫혔던 문을 열고 있다. 지난 5일엔 기술·의약·인공지능(AI)·재생에너지 분야 등에서 특출난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세계에서 과학자, 지식인, 혁신 인재를 끌어들이겠다”는 포부다. 기존엔 일정 기간 사우디에 거주한 이슬람교도 등 까다로운 조건을 갖춘 이들에게만 시민권을 내줬다. 지난달엔 처음으로 외국인 금융투자자, 의사, 엔지니어 등에게 가족까지 포함해 장기간 비자를 주는 ‘프리미엄 영주권’ 제도를 내놨다. 여성 인재를 모으기 위해 운전 금지 등 여성 관련 규제도 여럿 폐지했다.

그간 무슬림 성지순례객 이외엔 사실상 금지됐던 외국인 자유 관광도 할 수 있게 됐다. 사우디 당국은 지난 9월 말부터 49개국에 온라인 관광비자 발급을 시작했다. 사우디는 성지순례객 위주 연 4000만 명 수준인 관광객 규모를 2030년까지 1억 명으로 늘리는 게 목표다.

기업 환경도 변하고 있다. 6월 사우디 증시 상장사에 대한 외국 전략투자자 지분 제한을 풀었다. 작년엔 도·소매, 금융보험, 통신업 등을 제외한 대부분 분야에서 외국 투자기업이 지분 100%로 사우디에 진출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자국 내 창업·경영 지원 방안 또한 대거 내놨다. 신용대출 절차를 간소화하고 온라인 수출입 인증 플랫폼을 출범했다. 주요 수출입 항구인 지다항 인프라를 강화했다.

이 같은 조치 덕분에 사우디는 올해 세계에서 기업 환경이 가장 크게 개선된 국가로 꼽혔다. 세계은행의 2020년 비즈니스 환경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는 세계 190개국 중 62번째로 기업 친화적이다. 전년(92위) 대비 30계단 뛰어올랐다. 세계은행은 “사우디가 그간 부실했던 기업 지원 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치며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석유 의존 경제, 바꿔야 산다”

사우디가 전방위 개혁에 나선 것은 석유에만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다. 6월 국제통화기금(IMF) 발표에 따르면 사우디는 석유산업이 GDP의 40%가량을 차지한다. 수출 이익의 80%, 재정 수입의 70%가 석유산업에 달려 있다. IMF는 “비석유 부문 경제활동도 사우디 정부가 석유 수출을 통해 얻은 수입을 기반으로 벌이는 사업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렇다 보니 유가 추이에 따라 국가 경제 전체가 흔들리기 일쑤다. 2016년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자 사우디 경제성장률은 1%대로 급락했다. 올 들어 원유 가격이 배럴당 40~60달러대를 오르내리자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사우디 경제 전망을 놓고 갈팡질팡했다.

저유가 추세 장기화로 인한 타격도 크다. 작년 사우디의 재정적자는 GDP의 4.6%였다.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작년 1월 기존엔 없던 부가가치세를 도입하고 공무원 등의 각종 특권을 줄였지만 역부족이다. IMF는 사우디의 올해 재정적자가 GDP의 7%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사우디 당국은 내년에는 적자폭이 더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 석유 수요 둔화, 미국의 셰일에너지 생산 확대, 대체에너지 기술 개발 등 앞으로 유가를 내릴 요인이 여럿 있어서다.

‘사우디판 실리콘밸리’ 조성…문제는 돈

사우디는 경제 수입원 다각화를 위해 초대형 사업을 추진 중이다. 비전 2030의 하이라이트 격인 네옴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북서쪽 사막 한복판에 사우디판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조성하는 게 목표다. 이집트 요르단과 맞닿아 있는 곳에 2만6500㎢ 규모로 들어선다. 서울의 43.8배 규모다. 빈 살만 왕세자는 2030년 네옴이 조성되면 1000억달러(약 119조원)의 경제 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업에는 5000억달러가 투입된다.

사우디 정부는 네옴을 독자적인 세금·사법 체계를 갖춘 특별경제구역으로 키울 계획이다. 네옴은 에너지, 생명공학,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문화, 패션, 스포츠, 디자인, 교육 등 16개 분야에 특화한 12개 구역으로 이뤄진다. 빈 살만 왕세자가 테슬라, 소프트뱅크 등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려고 물밑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수 인재를 모으기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교육 시설도 들인다. 고급 식당과 호텔을 비롯해 각종 유흥 시설도 마련한다.

일각에선 ‘꿈같은 청사진’에 회의론도 나온다. 막대한 예산이 들 전망인 데다 목표 달성 기간이 너무 짧아서다. 알자지라 등 중동권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네옴 조성이 예정된 일대는 기존 인프라가 거의 없다. 정식 도로가 없는 마을이 수두룩할 정도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사우디는 국부펀드가 조달하는 자금에다 외국 투자금도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아예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사업인데,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사우디가 화려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