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세번째 경제 위기, 과거와는 다르다 [박동휘의 베트남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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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기준 확진자 169명, 공장 등 필수 시설 제외 '셧다운'
4월15일까지 사실상 전국 이동중지 명령
'마스크 필수' 문화 덕에 코로나19 방역 '선방'
1998년, 2008년에 이은 세번째 위기
해외 투자 급감에 연간 32조원 관광수입도 끊겨
글로벌공급사슬에 연계된 베트남 경제
과거 위기 때와 달리 외국 자본 쉽게 못 나가
대공황급 불황만 아니면 베트남 경제 곧 회복될 듯
4월15일까지 사실상 전국 이동중지 명령
'마스크 필수' 문화 덕에 코로나19 방역 '선방'
1998년, 2008년에 이은 세번째 위기
해외 투자 급감에 연간 32조원 관광수입도 끊겨
글로벌공급사슬에 연계된 베트남 경제
과거 위기 때와 달리 외국 자본 쉽게 못 나가
대공황급 불황만 아니면 베트남 경제 곧 회복될 듯
한낮의 하롱베이엔 적막만이 흘렀다. 관광객으로 떠들썩했던 크루즈 선착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을 바다 위 절경으로 실어 나르던 유람선들은 항구에 닻을 내린 채 잔물결에 조용히 흔들렸다. 코로나 신종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유럽인 관광객이 하롱베이를 다녀간 것으로 확인되자 베트남 보건 당국은 식당, 호텔, 골프장을 포함해 하롱베이의 모든 시설에 ‘셧다운’ 명령을 내렸다.
코로나19가 글로벌 펜데믹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28일 오전 기준으로 확진자가 169명으로 늘어나자 베트남도 경계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하롱베이를 비롯해 베트남 전역의 관광지를 폐쇄한데 이어 지난 20일엔 모든 항공기의 베트남 진입을 봉쇄했다.
25일엔 전국에 있는 수용 규모 30인 이상의 식당, 카페, 업소 등에 대해 이달 말까지 영업활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26일 오전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긴급 발표문을 통해 27일 자정을 시작으로 4월15일까지 사실상 전국적인 이동 중지령을 내렸다. 20인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고, 대중 교통도 중지시켰다. 하노이, 호찌민시에서 항공편으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도 금지됐다. 베트남 정부는 이 같은 조치로 4월15일까지 사실상 전국적인 이동 중지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라는 게 베트남 정부의 권고 사항이다. 28일 하노이와 호찌민시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외출할 경우 엄격한 행정 처벌을 집행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현재까지 베트남의 코로나19 대처는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의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 중이다. 베트남 내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제로’다. 진단 키트(kit) 수급에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기동 세계보건기구(WHO) 베트남 사무소장은 “베트남 내 코로나19 확진 검사가 가능한 병원은 22곳”이라며 “이들 병원은 베트남 업체가 개발한 진단 키트를 우선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보건부는 비엣A코퍼레이션과 밀리터리메디컬아카데미가 개발한 진단 키트를 6개월 간 한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6개월 간 효과를 검증한 후에 공식 진단 키트로 지정할 지를 결정하겠다는 의미다.
인구가 약 1억 명에 달하는 베트남이 코로나19 방어에 효과를 거두고 있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꼽힌다. 무상 의료 시스템은 농촌 구석까지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해 음압 시설을 갖춘 대형 병원이 적긴 하지만, 적어도 경증 환자들까지 대도시, 대형 병원으로 쏠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마스크 착용이 보편화돼 있다는 점은 코로나19 방역에 관한 한 베트남의 큰 장점 중 하나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마스크는 필수다. 문화도 ‘사회적 거리두기’에 유리한 편이다. 베트남에선 친한 사람과 만날 때에도 별다른 신체 접촉 없이 인사를 나눈다. 술자리에서 건배 후 동석한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일이 있지만, ‘악수=서양 문화=서양은 선진국’이란 인식에서 나온 관행이어서 코로나19 사태 이후로는 사실상 근절됐다. 가족 중심의 사회라는 점도 방역에 효과적이다. ‘자신이 걸리면 가족 전체가 감염될 수 있다’는 생각 덕분에 방역 활동에 적극적이다. 베트남은 대부분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가 많다. 부모 세대는 국가로부터 집과 땅을 불하받은데 비해 젊은 세대는 가파르게 오른 집값을 감당하기엔 소득이 적은 편이어서 대가족을 이루는 게 경제적으로 유리하다. 기업도 90% 가량은 가족 기업 형태다. 일가 친척들이 모여서 장사하는 소규모 자영업이 주류라는 얘기다.
한국처럼 전자 상거래와 배달 문화가 발달해 있어 사재기 현상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베트남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이 6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에 대비해 주요 식품에 대한 국가 보유분을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노이산업통상국에 따르면 하노이는 평상시 수요 대비 보유분을 품목별로 30~50% 가량 늘렸다. 쌀은 4만6400t 이상을 확보해놨다. 지방산업통상국은 올해 2분기 동안 식품 보유분을 평상시 대비 2배로 늘리기 위해 약 174조동을지출할 계획이다. 63개 성과 시 중 55개는 격리된 위치에 상품을 운송하는 법을 마련하는 등 비상계획안을 확보했다.
산업공단 내 감염이 ‘제로’라는 점은 베트남 정부의 코로나19 방어책이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주로 FDI(외국인직접투자) 기업들이 몰려 있는 전국의 산업공단은 베트남 경제를 지탱해주는 핵심이다. 베트남 관세청에 따르면 3월 중순까지 올해 베트남의 교역액은 978.5억 달러로 전년과 비교해 4.4% 증가했다. 수출은 502.9억 달러로 증가율이 7%에 달했다. 글로벌 코로나19 펜데믹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내 수출 기업들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다는 의미다.
우한 등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만해도 중국산 원부자재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됐었다. 기업들이 긴 설날 연휴에 대비해 연초에 재고를 미리 확보해 놓은 데다 중국과의 국경 무역이 재개되면서 중국-베트남-수출 시장으로 이어지는 공급사슬(supply chain)은 대부분 복구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베트남 투자 1위인 한국 기업들도 대부분 정상 가동 중이다. 삼성디스플레이, LG전자, LG디스플레이 등 주요 기업들은 베트남 정부로부터 예외를 인정받아 핵심 인력들을 한국에서 수혈 받았다. 하이퐁 장쥐에 공단에 있는 기계설비업체인 A사 대표는 “한국에서 엔지니어들이 입국하지 못해 공장 설비를 까는데 문제가 있었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고 오히려 베트남 직원들이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인도, 태국, 인도네시아 등 베트남의 경쟁국에서 공장 ‘셧다운’ 사례가 나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만 해도 구미공장에서 확진자가 발생하자 신형 휴대폰 생산 물량 일부를 베트남 공장으로 돌렸다. LG전자 역시 하이퐁 내 공장 캐파(capa)를 늘릴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기업들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중국에 쏠려 있던 부품 및 원자재 공급원을 다양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베트남엔 호재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베트남도 코로나19로 인한 글로벌 불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당장 해외로부터의 신규 투자가 급감할 가능성이 높다. UNCTAD(국제연합무역개발협의회)는 최신 보고서에서 글로벌 FDI가 작년 대비 40% 가량 급감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기구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올 1월에 글로벌 FDI가 지난해에 비해 5%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올해 첫 2개월 간 베트남으로 유입된 FDI 등록자본금은 65억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23.6% 감소했다. 이행 자본금도 25억 달러로 5% 감소했다. 3월엔 감소폭이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코로나19 대확산을 계기로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각국이 자국 우선주의에 휩싸일 수 있다는 점은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이 직면하게 될 또 다른 위험이다. 대량 실업 사태에 맞닥뜨린 각국 정부는 자국 기업들을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각종 정책을 마련 중이다. 글로벌 공급사슬이 ‘오프쇼어링(offshoring)’에서 ‘리쇼어링(reshoring)’으로 바뀌면 베트남은 만만치 않은 후폭풍에 시달릴 게 자명하다. 당장 첨단 산업 기술 육성이라는 베트남 정부의 전략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베트남 정부는 2020년을 기점으로 산업화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발전 전략을 준비 중이다. IT, 바이오, 자동차 부품, 석유화학 등 첨단 기술을 가진 해외 기업들을 적극 유치해 2035년 중소득 국가, 2045년에 고소득 국가로 부상하겠다는 게 골자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동차 산업이다.
베트남 정부는 재계 1위인 빈그룹이 지난해부터 가동을 시작한 빈패스트라는 자동차 제조업체를 적극 후원 중이다. 한국 등 제조업 강국에서 부품 업체들을 유치해 자동차 생산을 위한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게 베트남 정부의 목표다. 빈패스트가 4월3~5일 하노이 포뮬러1을 유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코로나19의 불길이 다시 번지면서 포뮬러1은 무기한 연기됐다.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베트남은 복합 위기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가용 자원이 바닥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관광 산업이 붕괴 위기에 처하면서 당장 베트남 정부의 세수(稅收)에 비상등이 켜졌다. 관광 산업은 베트남의 최대 수입원 중 하나다. 베트남 정부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산업 육성과 함께 관광을 향후 키워야 할 중점 분야로 지정했다.
베트남은 관광으로 2018년에만 637조동(약 32조원)을 벌어들였다. 전년 대비 17.7% 성장했다. 작년엔 약 1800만 명이 베트남을 다녀갔다. 700조동 이상을 썼을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베트남 정부의 지난해 세수가 1425조동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광 수입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아직 중국 등 아시아에 국한됐던 올해 첫 2개월에만 베트남의 관광업은 약 70억 달러를 날려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한창 성장 중이던 내수 시장도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어 정부 재정 수입에 직격탄을 날릴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 민간경제발전리서치이사회(IVBorad)가 이달 초에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가 향후 6개월 이상 지속되면 베트남 내 74%의 기업이 파산할 것으로 예측됐다. 음식점, 호텔 등은 고객이 사라지면서 종업원들을 불가피하게 해고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애써 만들어 놓은 재정 건정성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다. 베트남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부채 비율의 상한선을 65%로 정하는 등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는데 힘써 왔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쳐왔을 때에 대비하자는 차원에서다. 지난해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57% 수준이었다. 돈 쓸 곳이 많은 베트남 정부로선 부채 비율 상한선을 정하는 건 피치 못할 고육지책이다. 워낙 재정 여력이 부족하자 베트남 정부는 지난해 GDP 산정계수를 변경했다. 덕분에 상한선 설정의 모수(母數)인 GDP가 상승했고, 공공 부채 비율은 낮아지는 효과를 얻었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는 정부가 공들여 온 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기업들의 연쇄 도산을 막기 위해 기업소득세 인하, 부가가치세 인하, 체납 벌금 면제를 비롯해 은행을 통한 유동성 공급에도 나서야 할 상황이다. 시중 은행의 대출 증가율을 올해 약 11%대로 묶어 놓을 정도로 베트남 정부가 금융 부문의 무분별한 대출을 억제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의 상황은 우리 밖으로 여러 마리의 토끼들이 날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가, 환율, 외환보유고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한정된 재정을 제조업 육성, ‘인프라’ 건설 등 선순위 과제에 집중적으로 쏟아 부어 연 6~7%대의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겠다는 베트남 정부의 목표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베트남 계획투자부(MPI)는 올해 GDP성장률을 7년래 최저인 5.96%로 예상하고 있으나, 바닥이 어디일 지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선진국들에 비하면 베트남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양적 완화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베트남 기업들은 각자 도생에 나서야한다. 빈그룹의 유동성 위기설도 나올 정도다. 빈그룹은 자동차, 가전, 스마트폰 제조업에 뛰어들면서 유통 부문을 재계 2위인 마산그룹에 매각하는 등 제조업 투자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빈그룹의 투자금은 베트남 경제 성장에 베팅한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계 금융기관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그룹으로부터 약 1조원을 유치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국제 금융 시장이 경색될 경우 빈그룹이 해왔던 역외펀딩에도 어려움이 예상된다. 포드, 델타, 메이시스 등 굴지의 미국 회사들이 발행한 회사채조차 정크본드로 전락한 상황이다.
1986년 도이머이 개혁 이후 베트남은 두 번의 위기를 맞았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를 강타한 1998년의 외환위기다. 당시 아시아의 용으로 불리던 한국이 직격탄을 맞았고, 태국도 바트화 폭락 등 전대미문의 위기를 겪었다. 베트남도 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96년에 9%대를 유지했던 GDP 성장률은 1998년 5.7%, 1999년 4.7%로 급전직하했다.
당시 상황은 엄밀히 말하면 위기였다기보다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MPI 차관을 역임한 응우옌 마이 베트남외국인투자기업협회(VAFIE) 회장은 “한국, 태국 등을 떠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책을 짰어야 했는데 베트남은 오히려 법인세 혜택을 축소하는 등 거꾸로 행동했다”고 설명했다. 불난 집에서 나온 손님들을 자국으로 유치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는 1996년 84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1997년 46억 달러, 1999년 15억 달러로 급전직하했다. 수출 또한 1996년 33.2%의 높은 증가율에서 1999년 1.9%로 하락했다.
두 번째 위기는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직후에 찾아왔다. 2008년 미국발(發) 서브프라임 위기가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번지자 베트남 경제위기설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 해 5월13일 일본계 다이와 증권은 ‘베트남 IMF(국제금융기구) 도움 요청 가능성’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해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이로 인해 S&P, 피치,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일제히 베트남 경제에 대한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당시의 위기도 베트남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베트남 GDP 성장률은 2004년 7.5%를 시작으로 2007년까지 연평균 7%대를 기록했다. WTO 가입은 이 같은 자신감에 근거했다. 국제 무역, 금융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입함으로써 베트남은 아시아의 신흥 강자로 부상하길 원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기회를 또 다시 날려버렸다. 해외에서 투자금이 쏟아 들어오자 국영기업과 은행들은 돈 잔치를 벌였다. 한국의 현대중공업을 벤치마킹하겠다던 국영 조선업체인 비나신(Vinashin)은 비효율과 부패로 수조원을 날려버린 채 2009년에 공중분해됐다.
국영, 민영을 막론하고 기업들은 저마다 부동산에서 한 몫 잡으려고 앞 다퉈 경쟁했다. 유통업자들은 내수가 살아나자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수입품을 들여와 부(富)를 거머 쥐었다. 그렇게 번 돈은 대부분 부동산에 들어갔다. 2008년과 2009년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고, 외국계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베트남은 자산 가격 폭락과 외환 시장 불안,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은행들의 무분별한 유동성 확대를 방조했다. 2005~2007년 통화공급량은 135% 증가했다. 은행 신규 대출 증가율은 2006년 29%, 2007년 54%에 달했다. 유동성 확대로 인해 부동산, 주식 시장엔 거품이 심각하게 끼여 있었다. 2008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베트남 정부는 위기설을 부인했다. 2008년 경제성장률을 기존 8%에서 6.5~7%로 낮추는 선에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2008년 베트남의 GDP 성장률은 5.6%에 그쳤다. 이듬해엔 5.3%로 추락했다. 2015년이 돼서야 다시 6%대로 진입했다. 2008년 삼성전자가 하노이 북부에 있는 박닌성에 약 5조원을 들여 휴대폰 등의 제조 공장을 설립하고, LG전자 등 LG그룹이 2012~2105년에 하이퐁에 약 1.5조원을 투자하는 등 대규모 FDI가 유입된 덕분이다.
글로벌 코로나19 확산은 베트남에 세 번째 위기를 안겨 줄 게 자명하다. 제1의 수출 시장인 미국의 경기 침체가 어느 정도로, 언제까지 지속될 지가 가장 큰 변수다. 유럽, 일본, 한국 등 주요 수출 시장이 무너지면 베트남도 그 여파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외국인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베트남 주가지수는 700선마저 위협받고 있다. 올 초만 해도 VN지수는 1000포인트를 넘나들었다.
이번의 위기는 과거 두 번의 위기와는 성격이 확실히 다르다. 베트남은 과거와 달리 글로벌공급사슬(Global Supply Chain)의 핵심지다. 중국, 한국에서 부품과 반제품 등을 들여와 베트남은 이를 조립, 가공해 수출 시장에 공급한다. 글로벌 경제와의 연관도가 훨씬 커졌다는 얘기다. 수출 시장이 침체되면 베트남 경제의 동반 하락이 불가피하다.
거꾸로 ‘GSC’ 효과는 베트남을 추락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삼성전자나 LG전자가 갑작스럽게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베트남 정부가 그동안 체력을 비축한 덕분에 위기를 견딜 힘을 갖고 있다는 점도 과거의 위기 때와는 다르다.
코로나19가 베트남의 혁신을 앞당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베트남 정부는 그동안 부르짖었던 전자 정부, 모바일 결제, 전자상거래, 온라인 교육 플랫폼 구축 등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완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전자 정부는 관료들로부터 인허가를 위한 도장을 뺏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어서 베트남 정부의 투명성을 높이는데 필수 요소로 간주된다. 지지부진하던 국영기업 민영화에도 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 재정을 보충하고, 증권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국영기업을 상장하는 것 외엔 대안이 그다지 없다.
물론, 이 같은 전망들은 코로나19가 ‘닥터 둠’ 루비니 교수 같은 비관론자들의 말처럼 대대(大大)공황급 경기침체로 번지지 않을 것이란 가정을 전제로 한다. ‘닥터 둠’의 예언이 현실화된다면, 베트남이든 어떤 국가든 경제 전망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박동휘 베트남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
코로나19가 글로벌 펜데믹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28일 오전 기준으로 확진자가 169명으로 늘어나자 베트남도 경계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하롱베이를 비롯해 베트남 전역의 관광지를 폐쇄한데 이어 지난 20일엔 모든 항공기의 베트남 진입을 봉쇄했다.
25일엔 전국에 있는 수용 규모 30인 이상의 식당, 카페, 업소 등에 대해 이달 말까지 영업활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26일 오전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긴급 발표문을 통해 27일 자정을 시작으로 4월15일까지 사실상 전국적인 이동 중지령을 내렸다. 20인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고, 대중 교통도 중지시켰다. 하노이, 호찌민시에서 항공편으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도 금지됐다. 베트남 정부는 이 같은 조치로 4월15일까지 사실상 전국적인 이동 중지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라는 게 베트남 정부의 권고 사항이다. 28일 하노이와 호찌민시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외출할 경우 엄격한 행정 처벌을 집행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현재까지 베트남의 코로나19 대처는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의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 중이다. 베트남 내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제로’다. 진단 키트(kit) 수급에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기동 세계보건기구(WHO) 베트남 사무소장은 “베트남 내 코로나19 확진 검사가 가능한 병원은 22곳”이라며 “이들 병원은 베트남 업체가 개발한 진단 키트를 우선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보건부는 비엣A코퍼레이션과 밀리터리메디컬아카데미가 개발한 진단 키트를 6개월 간 한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6개월 간 효과를 검증한 후에 공식 진단 키트로 지정할 지를 결정하겠다는 의미다.
인구가 약 1억 명에 달하는 베트남이 코로나19 방어에 효과를 거두고 있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꼽힌다. 무상 의료 시스템은 농촌 구석까지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해 음압 시설을 갖춘 대형 병원이 적긴 하지만, 적어도 경증 환자들까지 대도시, 대형 병원으로 쏠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마스크 착용이 보편화돼 있다는 점은 코로나19 방역에 관한 한 베트남의 큰 장점 중 하나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마스크는 필수다. 문화도 ‘사회적 거리두기’에 유리한 편이다. 베트남에선 친한 사람과 만날 때에도 별다른 신체 접촉 없이 인사를 나눈다. 술자리에서 건배 후 동석한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일이 있지만, ‘악수=서양 문화=서양은 선진국’이란 인식에서 나온 관행이어서 코로나19 사태 이후로는 사실상 근절됐다. 가족 중심의 사회라는 점도 방역에 효과적이다. ‘자신이 걸리면 가족 전체가 감염될 수 있다’는 생각 덕분에 방역 활동에 적극적이다. 베트남은 대부분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가 많다. 부모 세대는 국가로부터 집과 땅을 불하받은데 비해 젊은 세대는 가파르게 오른 집값을 감당하기엔 소득이 적은 편이어서 대가족을 이루는 게 경제적으로 유리하다. 기업도 90% 가량은 가족 기업 형태다. 일가 친척들이 모여서 장사하는 소규모 자영업이 주류라는 얘기다.
한국처럼 전자 상거래와 배달 문화가 발달해 있어 사재기 현상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베트남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이 6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에 대비해 주요 식품에 대한 국가 보유분을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노이산업통상국에 따르면 하노이는 평상시 수요 대비 보유분을 품목별로 30~50% 가량 늘렸다. 쌀은 4만6400t 이상을 확보해놨다. 지방산업통상국은 올해 2분기 동안 식품 보유분을 평상시 대비 2배로 늘리기 위해 약 174조동을지출할 계획이다. 63개 성과 시 중 55개는 격리된 위치에 상품을 운송하는 법을 마련하는 등 비상계획안을 확보했다.
산업공단 내 감염이 ‘제로’라는 점은 베트남 정부의 코로나19 방어책이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주로 FDI(외국인직접투자) 기업들이 몰려 있는 전국의 산업공단은 베트남 경제를 지탱해주는 핵심이다. 베트남 관세청에 따르면 3월 중순까지 올해 베트남의 교역액은 978.5억 달러로 전년과 비교해 4.4% 증가했다. 수출은 502.9억 달러로 증가율이 7%에 달했다. 글로벌 코로나19 펜데믹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내 수출 기업들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다는 의미다.
우한 등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만해도 중국산 원부자재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됐었다. 기업들이 긴 설날 연휴에 대비해 연초에 재고를 미리 확보해 놓은 데다 중국과의 국경 무역이 재개되면서 중국-베트남-수출 시장으로 이어지는 공급사슬(supply chain)은 대부분 복구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베트남 투자 1위인 한국 기업들도 대부분 정상 가동 중이다. 삼성디스플레이, LG전자, LG디스플레이 등 주요 기업들은 베트남 정부로부터 예외를 인정받아 핵심 인력들을 한국에서 수혈 받았다. 하이퐁 장쥐에 공단에 있는 기계설비업체인 A사 대표는 “한국에서 엔지니어들이 입국하지 못해 공장 설비를 까는데 문제가 있었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고 오히려 베트남 직원들이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인도, 태국, 인도네시아 등 베트남의 경쟁국에서 공장 ‘셧다운’ 사례가 나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만 해도 구미공장에서 확진자가 발생하자 신형 휴대폰 생산 물량 일부를 베트남 공장으로 돌렸다. LG전자 역시 하이퐁 내 공장 캐파(capa)를 늘릴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기업들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중국에 쏠려 있던 부품 및 원자재 공급원을 다양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베트남엔 호재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베트남도 코로나19로 인한 글로벌 불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당장 해외로부터의 신규 투자가 급감할 가능성이 높다. UNCTAD(국제연합무역개발협의회)는 최신 보고서에서 글로벌 FDI가 작년 대비 40% 가량 급감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기구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올 1월에 글로벌 FDI가 지난해에 비해 5%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올해 첫 2개월 간 베트남으로 유입된 FDI 등록자본금은 65억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23.6% 감소했다. 이행 자본금도 25억 달러로 5% 감소했다. 3월엔 감소폭이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코로나19 대확산을 계기로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각국이 자국 우선주의에 휩싸일 수 있다는 점은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이 직면하게 될 또 다른 위험이다. 대량 실업 사태에 맞닥뜨린 각국 정부는 자국 기업들을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각종 정책을 마련 중이다. 글로벌 공급사슬이 ‘오프쇼어링(offshoring)’에서 ‘리쇼어링(reshoring)’으로 바뀌면 베트남은 만만치 않은 후폭풍에 시달릴 게 자명하다. 당장 첨단 산업 기술 육성이라는 베트남 정부의 전략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베트남 정부는 2020년을 기점으로 산업화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발전 전략을 준비 중이다. IT, 바이오, 자동차 부품, 석유화학 등 첨단 기술을 가진 해외 기업들을 적극 유치해 2035년 중소득 국가, 2045년에 고소득 국가로 부상하겠다는 게 골자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동차 산업이다.
베트남 정부는 재계 1위인 빈그룹이 지난해부터 가동을 시작한 빈패스트라는 자동차 제조업체를 적극 후원 중이다. 한국 등 제조업 강국에서 부품 업체들을 유치해 자동차 생산을 위한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게 베트남 정부의 목표다. 빈패스트가 4월3~5일 하노이 포뮬러1을 유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코로나19의 불길이 다시 번지면서 포뮬러1은 무기한 연기됐다.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베트남은 복합 위기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가용 자원이 바닥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관광 산업이 붕괴 위기에 처하면서 당장 베트남 정부의 세수(稅收)에 비상등이 켜졌다. 관광 산업은 베트남의 최대 수입원 중 하나다. 베트남 정부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산업 육성과 함께 관광을 향후 키워야 할 중점 분야로 지정했다.
베트남은 관광으로 2018년에만 637조동(약 32조원)을 벌어들였다. 전년 대비 17.7% 성장했다. 작년엔 약 1800만 명이 베트남을 다녀갔다. 700조동 이상을 썼을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베트남 정부의 지난해 세수가 1425조동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광 수입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아직 중국 등 아시아에 국한됐던 올해 첫 2개월에만 베트남의 관광업은 약 70억 달러를 날려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한창 성장 중이던 내수 시장도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어 정부 재정 수입에 직격탄을 날릴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 민간경제발전리서치이사회(IVBorad)가 이달 초에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가 향후 6개월 이상 지속되면 베트남 내 74%의 기업이 파산할 것으로 예측됐다. 음식점, 호텔 등은 고객이 사라지면서 종업원들을 불가피하게 해고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애써 만들어 놓은 재정 건정성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다. 베트남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부채 비율의 상한선을 65%로 정하는 등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는데 힘써 왔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쳐왔을 때에 대비하자는 차원에서다. 지난해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57% 수준이었다. 돈 쓸 곳이 많은 베트남 정부로선 부채 비율 상한선을 정하는 건 피치 못할 고육지책이다. 워낙 재정 여력이 부족하자 베트남 정부는 지난해 GDP 산정계수를 변경했다. 덕분에 상한선 설정의 모수(母數)인 GDP가 상승했고, 공공 부채 비율은 낮아지는 효과를 얻었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는 정부가 공들여 온 그간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기업들의 연쇄 도산을 막기 위해 기업소득세 인하, 부가가치세 인하, 체납 벌금 면제를 비롯해 은행을 통한 유동성 공급에도 나서야 할 상황이다. 시중 은행의 대출 증가율을 올해 약 11%대로 묶어 놓을 정도로 베트남 정부가 금융 부문의 무분별한 대출을 억제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의 상황은 우리 밖으로 여러 마리의 토끼들이 날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가, 환율, 외환보유고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한정된 재정을 제조업 육성, ‘인프라’ 건설 등 선순위 과제에 집중적으로 쏟아 부어 연 6~7%대의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겠다는 베트남 정부의 목표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베트남 계획투자부(MPI)는 올해 GDP성장률을 7년래 최저인 5.96%로 예상하고 있으나, 바닥이 어디일 지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선진국들에 비하면 베트남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양적 완화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베트남 기업들은 각자 도생에 나서야한다. 빈그룹의 유동성 위기설도 나올 정도다. 빈그룹은 자동차, 가전, 스마트폰 제조업에 뛰어들면서 유통 부문을 재계 2위인 마산그룹에 매각하는 등 제조업 투자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빈그룹의 투자금은 베트남 경제 성장에 베팅한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계 금융기관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그룹으로부터 약 1조원을 유치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국제 금융 시장이 경색될 경우 빈그룹이 해왔던 역외펀딩에도 어려움이 예상된다. 포드, 델타, 메이시스 등 굴지의 미국 회사들이 발행한 회사채조차 정크본드로 전락한 상황이다.
1986년 도이머이 개혁 이후 베트남은 두 번의 위기를 맞았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를 강타한 1998년의 외환위기다. 당시 아시아의 용으로 불리던 한국이 직격탄을 맞았고, 태국도 바트화 폭락 등 전대미문의 위기를 겪었다. 베트남도 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96년에 9%대를 유지했던 GDP 성장률은 1998년 5.7%, 1999년 4.7%로 급전직하했다.
당시 상황은 엄밀히 말하면 위기였다기보다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MPI 차관을 역임한 응우옌 마이 베트남외국인투자기업협회(VAFIE) 회장은 “한국, 태국 등을 떠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책을 짰어야 했는데 베트남은 오히려 법인세 혜택을 축소하는 등 거꾸로 행동했다”고 설명했다. 불난 집에서 나온 손님들을 자국으로 유치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는 1996년 84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1997년 46억 달러, 1999년 15억 달러로 급전직하했다. 수출 또한 1996년 33.2%의 높은 증가율에서 1999년 1.9%로 하락했다.
두 번째 위기는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직후에 찾아왔다. 2008년 미국발(發) 서브프라임 위기가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번지자 베트남 경제위기설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 해 5월13일 일본계 다이와 증권은 ‘베트남 IMF(국제금융기구) 도움 요청 가능성’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해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이로 인해 S&P, 피치,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일제히 베트남 경제에 대한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당시의 위기도 베트남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베트남 GDP 성장률은 2004년 7.5%를 시작으로 2007년까지 연평균 7%대를 기록했다. WTO 가입은 이 같은 자신감에 근거했다. 국제 무역, 금융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입함으로써 베트남은 아시아의 신흥 강자로 부상하길 원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기회를 또 다시 날려버렸다. 해외에서 투자금이 쏟아 들어오자 국영기업과 은행들은 돈 잔치를 벌였다. 한국의 현대중공업을 벤치마킹하겠다던 국영 조선업체인 비나신(Vinashin)은 비효율과 부패로 수조원을 날려버린 채 2009년에 공중분해됐다.
국영, 민영을 막론하고 기업들은 저마다 부동산에서 한 몫 잡으려고 앞 다퉈 경쟁했다. 유통업자들은 내수가 살아나자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수입품을 들여와 부(富)를 거머 쥐었다. 그렇게 번 돈은 대부분 부동산에 들어갔다. 2008년과 2009년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고, 외국계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베트남은 자산 가격 폭락과 외환 시장 불안,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은행들의 무분별한 유동성 확대를 방조했다. 2005~2007년 통화공급량은 135% 증가했다. 은행 신규 대출 증가율은 2006년 29%, 2007년 54%에 달했다. 유동성 확대로 인해 부동산, 주식 시장엔 거품이 심각하게 끼여 있었다. 2008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베트남 정부는 위기설을 부인했다. 2008년 경제성장률을 기존 8%에서 6.5~7%로 낮추는 선에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2008년 베트남의 GDP 성장률은 5.6%에 그쳤다. 이듬해엔 5.3%로 추락했다. 2015년이 돼서야 다시 6%대로 진입했다. 2008년 삼성전자가 하노이 북부에 있는 박닌성에 약 5조원을 들여 휴대폰 등의 제조 공장을 설립하고, LG전자 등 LG그룹이 2012~2105년에 하이퐁에 약 1.5조원을 투자하는 등 대규모 FDI가 유입된 덕분이다.
글로벌 코로나19 확산은 베트남에 세 번째 위기를 안겨 줄 게 자명하다. 제1의 수출 시장인 미국의 경기 침체가 어느 정도로, 언제까지 지속될 지가 가장 큰 변수다. 유럽, 일본, 한국 등 주요 수출 시장이 무너지면 베트남도 그 여파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외국인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베트남 주가지수는 700선마저 위협받고 있다. 올 초만 해도 VN지수는 1000포인트를 넘나들었다.
이번의 위기는 과거 두 번의 위기와는 성격이 확실히 다르다. 베트남은 과거와 달리 글로벌공급사슬(Global Supply Chain)의 핵심지다. 중국, 한국에서 부품과 반제품 등을 들여와 베트남은 이를 조립, 가공해 수출 시장에 공급한다. 글로벌 경제와의 연관도가 훨씬 커졌다는 얘기다. 수출 시장이 침체되면 베트남 경제의 동반 하락이 불가피하다.
거꾸로 ‘GSC’ 효과는 베트남을 추락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삼성전자나 LG전자가 갑작스럽게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베트남 정부가 그동안 체력을 비축한 덕분에 위기를 견딜 힘을 갖고 있다는 점도 과거의 위기 때와는 다르다.
코로나19가 베트남의 혁신을 앞당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베트남 정부는 그동안 부르짖었던 전자 정부, 모바일 결제, 전자상거래, 온라인 교육 플랫폼 구축 등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완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전자 정부는 관료들로부터 인허가를 위한 도장을 뺏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어서 베트남 정부의 투명성을 높이는데 필수 요소로 간주된다. 지지부진하던 국영기업 민영화에도 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 재정을 보충하고, 증권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국영기업을 상장하는 것 외엔 대안이 그다지 없다.
물론, 이 같은 전망들은 코로나19가 ‘닥터 둠’ 루비니 교수 같은 비관론자들의 말처럼 대대(大大)공황급 경기침체로 번지지 않을 것이란 가정을 전제로 한다. ‘닥터 둠’의 예언이 현실화된다면, 베트남이든 어떤 국가든 경제 전망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박동휘 베트남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