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달러' 황당한 유가가 출현한 이유 [김현석의 월스트리트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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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밤(미 동부시간) 거래가 시작된 국제원유시장에서는 유가가 큰 폭으로 하락했습니다. 미국의 벤치마크인 서부텍사스원유(WTI) 5월물 가격이 개장 직후 배럴당 14달러까지 떨어지자 투자자들은 놀랐습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20일 오후 12시께 WTI는 어느새 배럴당 5달러선까지 떨어졌고, 오후 2시께 1달러로 떨어지더니 곧 마이너스권으로 내려앉았습니다.
마이너스권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네거티브로 추락한 뒤에는 수직낙하가 시작됐습니다. 한때 배럴당 -40.32달러까지 기록한 유가는 결국 -37.63달러로 마감됐습니다. 지난 17일 종가 18.27달러에서 55.90달러, 305% 폭락한 겁니다. 5월물 원유를 팔려면 1배럴에 37달러까지 얹어줘야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가격이 어떻게 출현했을까요.
미 언론의 분석, 전문가 도움을 받아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① 선물 트레이더가 현물을 인수해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
5월물 WTI의 만기일은 4월21일입니다. 하루 남았습니다. 통상 선물시장의 트레이더들은 선물계약 만기가 다가오면 그 전에 실제 기름이 필요한 실수요자(정유사, 항공사 등)에게 넘기거나 아니면 다음월물로 롤오버를 하게됩니다.
대부분의 선물트레이더는 이렇게 종이로만 거래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선물을 가진 트레이더들은 실제 5월에 오클라호마 쿠싱에 가서 원유 실물을 인수해야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습니다.
이는 5월물 계약을 넘기려해도 지금 시장엔 계약을 인수하려는 실수요자가 사라진 탓입니다.
워낙 미국의 원유 소비가 줄어든 때문입니다. 작년동기에 비하면 하루 300만~500만배럴까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사리 합의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은 다음달에나 시작됩니다.
이에 따라 정유사들은 가장 먼저 생산량을 줄였습니다. 셰일오일회사 등 원유사들도 산유량을 줄였지만 이 수준에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정을 폐쇄했다가 생산을 재개하는 비용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는 소량을 계속 생산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재고는 지난주 2000만 배럴 가까이 늘었습니다.
또 다른 큰 손인 항공사는 비행기를 한 달째 세워놓고 있습니다. 기름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월가 관계자는 "대규모로 원유를 사오던 곳들이 모두 '원유가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원유를 팔겠다'는 셀러들만 붐비는 상황이 된 겁니다.
통상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원유저장고에 저장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 선택지가 아닙니다. 저유고가 거의 다 차서 받겠다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쿠싱의 저유시설에는 지난주까지 5500만배럴 재고가 들어차서 총 저장용량(8000만배럴)의 70% 수준이 찬 상태지만 남은 용량은 이미 모두 예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파이프라인 회사들마저 더 이상 원유를 넣지말라고 경고를 띄웠습니다. 파이프라인까지 꽉 들어찬 것이죠. 최근 유조선에 싼 원유를 실어놓겠다는 이들까지 증가하면서 용선료도 폭등했습니다.
선물트레이더 입장에서는 팔 곳도 없고, 저장할 곳도 없기 때문에 결국 버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유는 아무데나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돈을 붙여주며 버려달라고 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5월물 만기는 하루 더 남았습니다. 마지막날인 21일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② 6월물은 아직 배럴당 20달러선 유지
오늘 마이너스로 추락한 건 5월물 뿐 입니다. 선물트레이더가 현물을 인수해야하는 상황에 몰리면서 발생한 희비극입니다. 5월물은 이제 남은 계약이 10만계약을 조금 더 넘는 수준입니다.
이미 많은 트레이더는 6월물 거래로 넘어갔습니다. 6월물 계약은 이미 80만건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6월물 가격은 이날 18% 넘게 떨어졌지만 그래도 배럴당 20.43달러로 마감했습니다. 20달러선은 지킨 겁니다.
6월물은 오는 5월19일 만기를 맞습니다. 그 때면 미국 곳곳에서 경제 활동이 재개되면서 원유 수요가 되살아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주가 원유 소비가 가장 많이 감소한 때였을 수 있다"면서 "이번 주부터 독일 등 일부 국가가 경제활동을 재개하기 때문에 수요가 조금씩 살아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5월1일부터는 OPEC++의 감산도 시작됩니다. 유가가 지금처럼 낮다면 어쩔수 없이 감산에 동참하는 비 OPEC 국가나 미국 셰일업체들도 많을 겁니다. 베이커휴즈에 따르면 오일리그(시추설비) 수가 지난 17일 기준으로 529개에 그쳐 작년에 비해 무려 483개나 줄었습니다. 이런 기대가 아직은 6월물 가격을 배럴당 20달러대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가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6월물 만기일인 5월19일을 앞두고 다시 오늘과 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습니다.
선물트레이더들은 오늘 트라우마를 갖게됐습니다. 좀 더 빨리 선물계약 처리에 나설 것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레이더의 일부는 6월물 거래를 아예 건너뛰고 7월물로 넘어갔다"고 보도했습니다. 위험이 있는 6월물은 아예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③ 뉴욕 증시,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5월물 유가 폭락은 역대급 기록이긴 하지만 금융시장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사태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투자자가 많았다면 이날 뉴욕 증시에선 에너지주와 은행주가 동반 폭락했을 것입니다. 셰일회사들이 무너지고, 막대한 여신을 가진 은행들도 같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날 에너지 섹터는 3.29% 하락했고, 금융 섹터는 1.96% 내렸습니다. 많이 내리긴 했지만 기록적 폭락세는 아닙니다.
월가 관계자는 "이번 5월물 WTI 폭락은 시장에 큰 문제가 있음을 보여줬다"며 "하지만 이런 문제가 시장 전체로 확대될 지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장 기대처럼 경제 재개가 시작되고 원유 수요가 늘어난다면 오늘 일은 일회성 해프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어지고, 경제 봉쇄가 길어진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사태가 다른 시장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
그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20일 오후 12시께 WTI는 어느새 배럴당 5달러선까지 떨어졌고, 오후 2시께 1달러로 떨어지더니 곧 마이너스권으로 내려앉았습니다.
마이너스권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네거티브로 추락한 뒤에는 수직낙하가 시작됐습니다. 한때 배럴당 -40.32달러까지 기록한 유가는 결국 -37.63달러로 마감됐습니다. 지난 17일 종가 18.27달러에서 55.90달러, 305% 폭락한 겁니다. 5월물 원유를 팔려면 1배럴에 37달러까지 얹어줘야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가격이 어떻게 출현했을까요.
미 언론의 분석, 전문가 도움을 받아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① 선물 트레이더가 현물을 인수해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
5월물 WTI의 만기일은 4월21일입니다. 하루 남았습니다. 통상 선물시장의 트레이더들은 선물계약 만기가 다가오면 그 전에 실제 기름이 필요한 실수요자(정유사, 항공사 등)에게 넘기거나 아니면 다음월물로 롤오버를 하게됩니다.
대부분의 선물트레이더는 이렇게 종이로만 거래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선물을 가진 트레이더들은 실제 5월에 오클라호마 쿠싱에 가서 원유 실물을 인수해야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습니다.
이는 5월물 계약을 넘기려해도 지금 시장엔 계약을 인수하려는 실수요자가 사라진 탓입니다.
워낙 미국의 원유 소비가 줄어든 때문입니다. 작년동기에 비하면 하루 300만~500만배럴까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사리 합의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은 다음달에나 시작됩니다.
이에 따라 정유사들은 가장 먼저 생산량을 줄였습니다. 셰일오일회사 등 원유사들도 산유량을 줄였지만 이 수준에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정을 폐쇄했다가 생산을 재개하는 비용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는 소량을 계속 생산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재고는 지난주 2000만 배럴 가까이 늘었습니다.
또 다른 큰 손인 항공사는 비행기를 한 달째 세워놓고 있습니다. 기름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월가 관계자는 "대규모로 원유를 사오던 곳들이 모두 '원유가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원유를 팔겠다'는 셀러들만 붐비는 상황이 된 겁니다.
통상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원유저장고에 저장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 선택지가 아닙니다. 저유고가 거의 다 차서 받겠다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쿠싱의 저유시설에는 지난주까지 5500만배럴 재고가 들어차서 총 저장용량(8000만배럴)의 70% 수준이 찬 상태지만 남은 용량은 이미 모두 예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파이프라인 회사들마저 더 이상 원유를 넣지말라고 경고를 띄웠습니다. 파이프라인까지 꽉 들어찬 것이죠. 최근 유조선에 싼 원유를 실어놓겠다는 이들까지 증가하면서 용선료도 폭등했습니다.
선물트레이더 입장에서는 팔 곳도 없고, 저장할 곳도 없기 때문에 결국 버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유는 아무데나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돈을 붙여주며 버려달라고 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5월물 만기는 하루 더 남았습니다. 마지막날인 21일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② 6월물은 아직 배럴당 20달러선 유지
오늘 마이너스로 추락한 건 5월물 뿐 입니다. 선물트레이더가 현물을 인수해야하는 상황에 몰리면서 발생한 희비극입니다. 5월물은 이제 남은 계약이 10만계약을 조금 더 넘는 수준입니다.
이미 많은 트레이더는 6월물 거래로 넘어갔습니다. 6월물 계약은 이미 80만건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6월물 가격은 이날 18% 넘게 떨어졌지만 그래도 배럴당 20.43달러로 마감했습니다. 20달러선은 지킨 겁니다.
6월물은 오는 5월19일 만기를 맞습니다. 그 때면 미국 곳곳에서 경제 활동이 재개되면서 원유 수요가 되살아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주가 원유 소비가 가장 많이 감소한 때였을 수 있다"면서 "이번 주부터 독일 등 일부 국가가 경제활동을 재개하기 때문에 수요가 조금씩 살아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5월1일부터는 OPEC++의 감산도 시작됩니다. 유가가 지금처럼 낮다면 어쩔수 없이 감산에 동참하는 비 OPEC 국가나 미국 셰일업체들도 많을 겁니다. 베이커휴즈에 따르면 오일리그(시추설비) 수가 지난 17일 기준으로 529개에 그쳐 작년에 비해 무려 483개나 줄었습니다. 이런 기대가 아직은 6월물 가격을 배럴당 20달러대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가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6월물 만기일인 5월19일을 앞두고 다시 오늘과 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습니다.
선물트레이더들은 오늘 트라우마를 갖게됐습니다. 좀 더 빨리 선물계약 처리에 나설 것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레이더의 일부는 6월물 거래를 아예 건너뛰고 7월물로 넘어갔다"고 보도했습니다. 위험이 있는 6월물은 아예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③ 뉴욕 증시,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5월물 유가 폭락은 역대급 기록이긴 하지만 금융시장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사태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투자자가 많았다면 이날 뉴욕 증시에선 에너지주와 은행주가 동반 폭락했을 것입니다. 셰일회사들이 무너지고, 막대한 여신을 가진 은행들도 같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날 에너지 섹터는 3.29% 하락했고, 금융 섹터는 1.96% 내렸습니다. 많이 내리긴 했지만 기록적 폭락세는 아닙니다.
월가 관계자는 "이번 5월물 WTI 폭락은 시장에 큰 문제가 있음을 보여줬다"며 "하지만 이런 문제가 시장 전체로 확대될 지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장 기대처럼 경제 재개가 시작되고 원유 수요가 늘어난다면 오늘 일은 일회성 해프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어지고, 경제 봉쇄가 길어진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사태가 다른 시장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