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인 구찌, 생로랑, 보테가베네타, 발렌시아가에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 가죽 원단 등에 들어가는 원자재 90%의 생산·유통 과정을 분석해 탄소배출량과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을 따진다. 이른바 ‘환경 발자국’을 추적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 매년 ‘환경 손익계산서’를 발표한다. 환경에 악영향이 큰 부분에 대해선 새로운 공정을 적용해 개선하기도 한다.

이들 브랜드는 모두 프랑스 명품기업 케링그룹이 운영한다. 환경 손익계산서는 케링을 이끄는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2010년 일부 브랜드에 처음 도입했다. 2015년부터는 산하 브랜드 전체에 적용하고 있다. 이 덕분에 피노 CEO는 최근 핵심 경영 요소로 급부상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케링은 지난해 10월 월스트리트저널(WSJ) 선정 지속가능경영 실천기업 명단에 올랐다. 비즈니스모델·혁신 부문에선 대만 타텅그룹에 이어 글로벌 2위를 차지했다.

빠른 변화로 사업 키운 2세 CEO

피노 CEO는 아버지인 프랑수아 피노 창업자가 세운 소매 유통기업을 이어받은 2세 CEO다. 1987년 케링 전신인 피노프랭탕르두트그룹(PPR)에 구매부서 부장으로 입사해 2000년 PPR 부사장을 거쳐 2005년 아버지에게서 CEO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CEO 취임 후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빠르게 재편했다. 럭셔리 패션·보석·시계 분야에서 지라드페르고(시계), 브리오니(정장), 포멜라토(보석) 등 각종 브랜드를 인수해 명품 포트폴리오를 강화했다. 2013년엔 기존에 운영하던 온라인 가구업 등 일반 유통부문을 대거 정리하고 사명을 케링으로 바꿨다.

피노 CEO는 “럭셔리 기업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몇 년간은 자신이 인수를 주도한 일부 산하 브랜드를 과감히 정리했다. 2007년 인수한 푸마는 2018년, 2011년 인수한 볼컴은 2019년 매각했다. 둘 다 스포츠웨어 브랜드라 명품업계에 집중하려는 기업 전략에 맞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ESG 경영에 주목…“비즈니스 기회”

피노 CEO는 ESG 경영에 빠져 있다. 그는 최근 포천지에 “ESG 등 지속가능성을 강화하는 일은 비즈니스 기회를 잡는 것과 같다”며 “요즘엔 투자자와 소비자 모두가 기업의 환경·사회적 측면을 매우 민감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케링은 2025년까지 환경 손익계산서상 ‘환경 손실’을 작년 대비 40% 줄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각종 새 조치를 내놓고 있다. 몽골 내 캐시미어 생산지 일부에 대해선 염소 방목법을 바꿔 목초지를 보호하게 했다. 이를 위해 미국 항공우주국(NASA), 스탠퍼드대 등과 협업했다. 중국 내 섬유공장에는 새 대기·수질오염 기준치를 설정하고 이에 맞게 생산 과정을 바꿨다. 그는 “기업은 경영 활동으로 인해 환경이 오염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악영향을 줄여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피노 CEO는 2019년 말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패션협정’을 주도했다. 각 기업이 지속가능 경영을 추구한다는 가이드라인으로 프랑스 기업 60곳이 참여했다. WSJ는 “피노 CEO는 지속가능 부문에서 선도적인 경영자로 통한다”며 “그간 관련 조치를 활발하게 추진한 덕분”이라고 보도했다.

대대적인 디지털 투자로 코로나 타격 상쇄

구찌 가방
구찌 가방
피노 CEO는 디지털 투자를 늘리고 있다. 2012년부터 명품 온라인쇼핑 플랫폼 기업 육스네타포르테(YNAP)와 손잡고 합작기업을 세워 구찌를 제외한 모든 브랜드의 온라인쇼핑몰 판매망을 구축했다. ‘명품 이미지를 지키려면 서로 다른 브랜드가 섞여 있어선 안 된다’며 온라인쇼핑몰 입점을 꺼린 다른 기업들과 차별화한 조치였다.

글로벌 패션지 보그는 “케링은 전사적인 범위로 온라인 시장에 빨리 뛰어들었다”며 “브랜드별 웹사이트 판매 등 기존 전략을 고집한 라이벌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에 비해 훨씬 나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피노 CEO는 2017년엔 케링에 최고고객·디지털책임자(CCDO) 직위를 신설하고 전자상거래기업 이베이 출신인 그레고리 부티를 영입했다. 소비자 데이터관리와 고객관계관리(CRM) 등 각종 디지털 관련 사업 혁신에도 투자했다. 이 덕분에 코로나19 사태로 매장이 대거 문을 닫았을 때 타격을 일부 상쇄했다. 케링의 지난해 3분기 온라인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02% 뛰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