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앞으로 2년 뒤인 2023년에 제품 대부분을 자체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특정 제품 생산은 외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 활용을 늘려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인텔은 반도체 생산을 맡길 파운드리 회사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등이 인텔의 외주생산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텔의 자신감…"대부분 자체 생산하겠다"
인텔의 차기 최고경영자(CEO)로 내정된 팻 겔싱어는 21일(현지시간)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인텔의 7㎚(나노미터·1㎚=10억분의 1m) 기술 개발 상황을 점검한 결과 만족스러운 진전이 있었다”며 “우리의 2023년 제품 대다수가 내부에서 생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7㎚ 공정에서 제조된 중앙처리장치(CPU) 등 주력 제품이 2023년부터 판매될 것이라며 반도체 설계·생산·판매를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으로서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경쟁사인 엔비디아, AMD 등에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겔싱어는 또 “인텔 포트폴리오는 광범위하기 때문에 특정 기술과 제품에 대해서는 외부 파운드리 활용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계획과 관련해선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한 뒤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겔싱어의 이 같은 발언은 앞으로도 직접 생산이 주를 이루겠지만 위탁생산도 점차 늘려 나갈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첨단 칩을 만드는 데 자체 공장에 의존해온 인텔이 과거의 전통과 결별한 것”이라며 “사실상 반도체 제조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인텔이 ‘가장 값비싼 칩(CPU)’을 TSMC 등 아시아 경쟁사들에 아웃소싱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에 따르면 TSMC는 최근 인텔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외주생산 물량을 수주했고, 삼성전자는 사우스브리지 반도체(PC 메인보드에 들어가는 칩셋) 물량을 확보했다. 인텔은 2023년부터 CPU 일부 물량도 파운드리 업체에 맡길 계획이어서 TSMC, 삼성전자 등이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텔은 지난달 미국의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서드포인트로부터 반도체 사업에 ‘전략적 대안’을 모색하라는 압박을 받기도 했다. 당시 댄 러브 서드포인트 CEO는 공개 서한을 보내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분리하는 등 근본적 변화까지 검토하라”고 촉구했다. 인텔이 외부 파운드리 활용을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이 같은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관측된다.

인텔의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매출 실적 등은 아직까지 크게 나쁘지는 않다. 이날 공개된 작년 4분기 매출은 199억7800만달러로 시장 예상치(175억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재택근무와 원격수업 등이 확대되면서 PC 판매가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지난해 매출은 778억6700만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인텔은 이날 재무 관련 자료를 해킹당하며 예정보다 일찍 실적을 발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해커는 인텔 홍보팀 홈페이지를 공격해 실적 관련 인포그래픽 등을 빼갔다. 장 마감 6분 전에 해킹 사실을 인지한 인텔은 즉시 실적을 공개했다. FT는 해커가 실적 발표 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주식을 사기 위해 해킹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지난달에는 인텔과 시스코, 엔비디아 등이 배후가 러시아로 추정되는 해커들의 공격을 받았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