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아(홀로코스트·대말살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독일인에게 가장 큰 수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사진)는 2008년 건국 60년을 맞은 이스라엘 의회를 찾아 고개를 숙였다. 현직 독일 총리가 이스라엘 의회를 찾아 사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연설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주변국도 메르켈을 ‘유럽의 여왕’으로 인정하며 화답했다.

여왕이 퇴임한다. 26일 치러진 독일 하원 총선거 후 새 정부가 구성되면 메르켈의 임기는 끝난다. 2005년부터 16년간 집권하며 ‘무티(Mutti·엄마) 리더십’을 선보인 그다. 스캔들과 독재 없이 최장기간 재임한 메르켈은 독일에 두 번째 라인강의 기적을 선물하고 떠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첫 동독 출신 4선 여성 총리. 메르켈이 이룬 역사다. 퇴임을 앞둔 그는 또 하나의 기록을 쓴다. 독일 총리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첫 수장이 된다.

2005년 독일은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통일 후유증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됐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그랬던 독일은 메르켈 재임 기간 유럽의 패권 국가로 변신했다. 프랑스 영국보다 두 배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며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섰다.

메르켈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임 총리가 시작한 개혁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고 사회보장을 줄여 세금을 낮췄다. 시장 기능이 살아나자 실업률은 떨어졌다. 독일 실업률은 2005년 11%에서 지난달 5.5%까지 내려갔다. 20년 만의 최저다.

메르켈은 위기 때마다 해결책을 내놓으며 성장을 이끌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자동차 시장이 흔들리자 차량 구매 지원금을 늘리고 자동차세를 낮췄다.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해 노동단축 지원 프로그램도 가동했다. 우직한 리더십은 독일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메르켈리즘은 독일에서 권력을 과시하지 않고 다른 의견도 포용하는 힘 있는 리더십을 의미한다. 우유부단하다는 의미의 유행어 ‘메르켈하다(Merkln)’는 신중함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메르켈은 1954년 독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폴란드 태생 독일 경찰이었다. 메르켈이 폴란드 피가 흐른다고 말하는 이유다. 메르켈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 공산주의 청년운동에 가입하고 라이프치히대(옛 카를마르크스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사회주의 엘리트로 자랐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메르켈은 정계에 입문했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동독 정부 대변인에 올랐다. 이후 독일 기독민주연합 당대표를 지냈다. 2005년 총선에서 총리로 선출됐다. 3선 총리이던 메르켈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2016년 4선을 결심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메르켈에게 “세계의 단합을 이끌어달라”고 했다. 이듬해 선거에 나선 메르켈에겐 ‘자유 세계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붙었다.

메르켈은 유럽연합(EU) 내 최장수 정부 수반이다. 재임기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물론 조지 부시, 오바마,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프랑스 대통령은 세 번, 영국 총리는 네 번 바뀌었다. 상대편 지도자는 계속 바뀌었지만 유럽을 지켜낸다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2009년 남유럽 재정위기 때는 ‘유로화가 무너지면 유럽이 무너진다’며 그리스 등에 긴축 개혁을 요구했다. 2015년엔 EU 회원국 부담을 덜기 위해 시리아 등의 난민 100만 명을 수용했다.

코로나19 위기 대응 등에선 평가가 엇갈린다. 노동 유연성이 커졌지만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탈원전 정책에 속도를 낸 것도 과오로 남았다. 독일이 여전히 석탄 발전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최근 독일 홍수 사태 이후 에너지 정책에 대한 비판은 더 커졌다.

메르켈 후임은 안갯속이다. EU 수장 역할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독일에선 올라프 숄츠 사회민주당 대표, 아르민 라셰트 기독민주당 대표 등이 총리직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메르켈이 속한 기민당은 고전하고 있다. 사민당은 부자 증세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지지를 얻었다.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3당 연립정부가 나올 것이란 분석도 있다. 16년 만에 유럽과 독일이 모두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 놓였다.

독일 의회는 총선 후 비밀 투표로 총리를 뽑는다. 연정 협상이 늦어지면 메르켈 퇴임식은 해를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려갈 때를 아는 정치인이 된 그의 마지막에 세계 각국은 박수를 보내고 있다. ‘추스(Tschüss) 무티(안녕 엄마).’ 그를 향한 독일인들의 작별 인사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