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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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동문회, 해병대 전우회, 호남 향우회. 한국에서 결집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친목 단체입니다. '호남 출신으로 해병대를 전역하고 고려대를 졸업했으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입니다.

세계적인 기술 중심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인맥과 조직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맥의 파워는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XXX 마피아'가 종종 거론될 정도입니다. 핀테크의 원조 페이팔(PayPal) 초기 멤버들을 뜻하는'페이팔 마피아'가 가장 유명합니다. 피터 틸 팔란티어 창업자 겸 클래리엄캐피탈 회장,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리드 호프먼 링크드인 창업자, 스티브 첸 유튜브 창업자 등이 대표적입니다.

요즘 실리콘밸리에 한국인과 한국계 스타트업, 벤처캐피털(VC)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의 모임이 활발하게 작동 중입니다. 눈에 띄는 인맥을 꼽아봤습니다.

하정우 이진형 등 '설곽' 출신 스타트업 창업자 두각

요즘 실리콘밸리에서 '서울과학고' 졸업생들의 활약상이 대단합니다.

서울과학고 동문들은 모교를 '설곽'이라고 부르던데요. 1989년 문을 연 설곽은 천재들이 모이는 대표적인 학교입니다. 실리콘밸리의 설곽 출신 스타트업 창업자론 자율주행 로봇 전문 스타트업 베어로보틱스의 하정우 최고경영자(CEO)가 대표적입니다. 하 CEO는 식당용 서빙 로봇인 베어로보틱스를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하고 고객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000억원 규모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하는 성과도 냈습니다.
하정우 베어로보틱스 창업자 겸 대표. 한경DB
하정우 베어로보틱스 창업자 겸 대표. 한경DB
한국인 여성 최초의 스탠퍼드 의대 교수인 이진형 엘비스(LVIS) CEO, 이 CEO의 동생 이제형 스트라티오 CEO, 임성원 임프리메드 CEO, 이건호 에누마 CTO(최고기술책임자) 등도 실리콘밸리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지역의 범위를 좀 넓혀보면 로스앤젤레스에 본사가 있는 어메이즈VR의 이승준 CEO도 서울과학고 출신입니다.

'올라웍스' 성공 사례보며 창업에 도전

실리콘밸리에서 서울과학고 출신이 약진하는 이유가 뭘까요. 한국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학생들이 국내외 명문 공대 진학을 했고 그 중에서도 뛰어난 인력들이 미국 석박사 과정을 거쳐 실리콘밸리에 남았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적어도 1990년대까지는 졸업생들이 의대보다 서울대 공대나 KAIST, 포항공대 등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에 서울과학고를 졸업한 스타트업 창업자는 "공대로 진학하는 게 당연했다"며 "과학고라는 정체성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의과대학에 가면 '안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구글 애플 같은 실리콘밸리 빅테크가 뜨기 전까지 과학고 졸업생들은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를 마치면 대학 교수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서울대 공대나 KAIST에 서울과학고 출신 교수가 많은 게 이런 이유입니다. 빅테크가 부상하면서 인재들이 대학 대신 고연봉의 빅테크(Big Tech)에 들어가 '첨단 기술 기업의 최전선'에서 뛰는 것을 매력적으로 느꼈다고 합니다. 지금도 실리콘밸리 유명 기업엔 명문대 교수를 뛰어 넘는 스펙을 가진 서울과학고 출신 인력들이 엔지니어로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그리고 빅테크에서 몇 년 간 경험을 쌓으면 자연스럽게 창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고 하네요.
서울과학고 전경. 한경DB
서울과학고 전경. 한경DB
실리콘밸리의 서울과학고 출신 인사들은 '선배 창업자들의 성공 사례'를 주로 얘기합니다. 서울과학고 동문 중 실리콘밸리의 문을 열어준 인물로는 엑셀러레이터(창업지원 및 투자업체) 퓨처플레이의 류중희 대표와 자율주행 비전 기술 전문 스트라드비전의 김준환 창업자를 꼽습니다.

류 대표와 김 창업자는 2006년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올라웍스'를 창업합니다. 컴퓨터, 휴대폰 등의 사진을 얼굴별로 인식해서 분류해주는 기술을 가진 회사입니다. 이 회사는 2012년 인텔 본사에 매각됩니다. 한 서울과학고 출신 한 스타트업 창업자는 "올라웍스의 성공 사례를 보면서 도전과 창업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며 "'마피아'란 말이 나올 정도로 올라웍스 출신의 창업이 활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울과학고 출신 스타트업 인사들의 카카오톡 대화방도 있는데, 현재 100여명이 들어와있다고 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떠들썩하게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종종 소규모 모임을 하면서 친목을 다진다고 합니다.

안익진(몰로코) 이근우(진에딧) 등 대구과학고 출신도 많아

실리콘밸리에서 대구과학고 출신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구과학고는 1988년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계 스타트업으로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반열에 올라선 몰로코의 안익진 CEO가 대구과학고 출신입니다. 이밖에 유전자 치료제 개발 스타트업 진에딧의 이근우 창업자, 이제범 전 카카오 대표도 대표적인 대구과학고 졸업생입니다.

서울과학고 출신 한 창업자는 "대구과학고는 서울과학고 출신보다 졸업생은 적지만 '인원 수 대비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활약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며 "실리콘밸리에서 이름이 오르 내리는 창업자들이 많다"고 평가했습니다.

VC업계에선 단연 '삼성벤처투자' 출신 약진

실리콘밸리의 양대 축은 벤처캐피털과 스타트업입니다. 한국계 스타트업에 '설곽' 인맥이 강하다면 벤처캐피털(VC)에선 단연 '삼벤'입니다. 삼벤은 삼성벤처투자를 줄여 부르는 말입니다.

삼성벤처투자는 미래 신사업 및 신기술 발굴의 조타수 역할을 하는 삼성그룹의 핵심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입니다. 1999년 설립됐고 2003년 2월 실리콘밸리 산호세(새너제이)에 사무소를 개설했습니다. 사무소 개설 멤버 중 실리콘밸리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브라이언 강 노틸러스벤처스 공동창업자 겸 대표와 음재훈 GFT벤처스 공동창업자 겸 대표입니다.

강 대표는 삼성벤처투자에서 약 10년 간 근무한 뒤 2007년 노틸러스벤처스를 창업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있는 초기 단계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 위주로 투자하는 회사입니다. 주로 높은 기술가치가 있는 딥테크놀로지(심층기술)업체들 위주로 투자합니다.

음 대표는 삼성벤처투자 이후 트랜스링크캐피털, TBT를 거쳐 GFT벤처스를 공동창업 했습니다. 엔비디아에서 투자 업무를 담당했던 제프 허브스트도 GFT벤처스에 합류했습니다.
삼성 로고. 연합뉴스
삼성 로고. 연합뉴스
LG그룹 신사업 발굴의 첨병 역할을 하는 CVC LG테크놀로지벤처스의 김동수 대표도 삼성벤처투자 출신입니다. 삼성전자 출신으로 2005년께 합류해 2017년 지사장까지 올랐습니다. 2018년부터 4년째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이끌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투자회사 블랙스톤 계열 벤처캐피털 밀레니엄파트너스의 제이 정 대표도 삼벤 출신입니다. 인텔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삼성벤처투자로 옮겼고 상무까지 승진했습닌다. 이후 SK그룹 e-모빌리티 그룹 헤드(전무)를 거쳤습니다.

이들보다 한 세대 밑의 삼벤 출신 벤처캐피털리스트로는 마이클 전 솔라스타벤처스 실리콘밸리지점장이 있습니다. 솔라스타벤처스는 아주그룹 계열 투자회사입니다. 아주그룹은 유명 벤처투자사 아주IB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삼벤 출신 인사들은 카카오톡 대화방을 통해 교류하고 종종 오프라인에서 만나며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삼성전자 배경으로 성장..."최첨단 기술투자에 능해"

삼성벤처투자 실리콘밸리도 개소 초기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의 투자 실적을 내세울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초기 멤버들은 삼성벤처투자라는 이름을 투자업계에 각인시키기 위해 발로 뛰었습니다. 한 삼벤 출신 인사는 "무작정 스타트업에 전화하고 네트워크 행사에 찾아가고 경쟁 CVC를 곁눈질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무소 개소 초창기엔 실수도 많았다"고 설명했습니다.

힘이 된 건 '삼성'이란 이름이었습니다. 일단 스타트업들에 대한 접근이 여느 신생 VC보다 쉬웠다고 합니다. 삼성벤처투자가 대기업인 삼성전자의 관계사였기 때문에, 스타트업들이 '삼성전자의 사업부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삼성벤처투자는 반도체, 스마트폰, 가전 등 삼성전자 사업과 밀접한 스타트업 투자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투자 실적이 쌓이면서 삼성벤처투자는 실리콘밸리의 탑티어(1류) CVC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삼벤이 투자한 스타트업들은 삼성전자 사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지금도 삼성벤처투자 출신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최첨단 기술 트렌드에 밝고 기업 투자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 정치인, 고위 관료, 재계·금융권 고위 인사 등이 실리콘밸리에 방문하면 가장 먼저 삼벤 출신 벤처캐피털리스트들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하네요.

삼벤 출신 이외에 실리콘밸리에서 관심을 받는 인맥으론 스탠퍼드 MBA(경영학석사) 출신들이 있습니다. 유명 벤처캐피털인 알토스벤처스의 한 킴(김한준) 대표와 음재훈 대표가 스탠퍼드 MBA 후배들을 자주 챙긴다고 합니다.

실리콘밸리=황정수/서기열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