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 지표가 시험대에 올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의 친환경 에너지 전환 압박이 기업의 경영환경과 동떨어진 것이란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美 블랙록 ESG 안건 찬성률 급감

우크라 전쟁에 'ESG 투자 열풍' 식었다
26일(현지시간)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관 ISS에 따르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올 상반기 투자기업들의 연례주주총회에서 환경 및 사회 이슈 관련 주주 제안의 24%에만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도 상반기 찬성률이 43%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블랙록은 이날 발표한 주주제안 투표 현황 보고서에서 “대부분의 기후변화 대응 관련 주주제안은 기업의 재무 실적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며 “우리 주변의 투자환경과 맥락이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랙록은 그간 ESG 투자 열풍을 선도해온 자산운용사다.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1월까지만 해도 투자자 연례 서한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동참하도록 기업에 요구하는 블랙록의 정책은 정치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장기적 수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블랙록이 조심스러워진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지난 2월 24일 이후다. 예기치 못한 전쟁은 에너지 등 전방위적인 비용 상승으로 이어졌다. 유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화석연료 투자의 수익성이 높다는 점도 자산운용사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블랙록은 지난 5월 공개한 스튜어드십 투자 지침에서 “ESG 투자 지침이 너무 규격화되고 당연한 규범처럼 여겨지고 있다. 개전 이후 투자 셈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무조건적인 ESG 열풍에는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방산업체 투자 빗장 푼 유럽 투자사

ISS 자료에 의하면 환경 및 사회 이슈 안건에 대한 주주들의 총 찬성률은 작년 상반기 36%에서 올해 27%로 떨어졌다. 경제연구기관 콘퍼런스보드는 “특히 기후변화 대응 등 친환경 주주제안에 대한 투자자들의 찬성률은 상반기 33%로 지난해 동기보다 4%포인트 쪼그라들었다”고 평가했다. 블랙록처럼 노골적으로 ESG에 반기를 든 또 다른 글로벌 자산운용사로는 뱅가드가 있다.

친환경 이슈뿐만이 아니다. 반전(反戰) 취지로 그동안 유럽 투자사들은 방산업체 투자를 금지해왔다. 스웨덴의 최대 금융회사 SEB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재무장의 필요성을 공론화했다. 방어 목적의 무기 사용에 관한 사회적 효용성도 재고되고 있다. SEB는 4월 1일부터 여섯 개 운용펀드를 국방 부문에 투자할 수 있도록 제한을 풀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업과 투자자, 정부 간의 이해상충은 때때로 E와 S, G 각각의 지표가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며 “예를 들어 유럽 각국 정부는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제재라는 윤리적 목표를 달성하고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화석연료에 의존함으로써 친환경 목표를 위반해야 하는 모순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을 지속가능한 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정의할 수 있는 ESG 진화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ESG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석연료 투자를 계속해온 프랑스 기업 토탈에너지의 높은 주주 수익률에도 이목이 쏠렸다. 토탈은 화석연료와 재생에너지 개발을 함께 추진하는 ‘양다리 전략’을 고수해왔다. 쉘이나 BP 등 다른 에너지 기업들이 새로운 화석연료 개발 투자에 조심스러워하는 것과 다른 행보였다.

패트릭 푸얀느 토탈 CEO는 러시아 야말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에 투자한 지분을 “적절한 인수자를 찾을 때까지 서둘러 팔지 않겠다”고 버티기도 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