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통화당국이 24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하락한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외환시장은 '통화당국의 공갈포' 취급을 하고 있어 엔저(低) 방어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15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전날 오전 외환거래에 참가하는 주요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호가 확인(레이트 체크)'을 실시했다. 호가 확인은 외환시장의 동향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장개입의 준비단계로 받아들여진다.

일본 통화당국은 환율을 제어할 때 '구두개입→호가 확인→시장 개입'의 3단계를 밟는다. 필요할 경우 호가 확인 절차 없이 바로 시장에 개입하는 한국은행보다 1단계를 더 거친다.

반세기 최대폭 추락한 엔화

전날 달러 당 엔화가치가 145엔선까지 떨어지자 일본 외환당국이 행동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145엔선이 무너지면 엔화 가치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말했다.

호가 확인 소식이 전해진 직후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143엔 안팎까지 상승했다. 이날도 142엔 후반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올해 엔화는 주요국 통화 가운데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지난 3월초 114엔이었던 달러당 엔화 가치는 반 년 만에 30엔 떨어졌다. 1973년 환율제도를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세다.

인플레를 잡으려는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가파르게 올리는 반면 일본은행은 경기회복을 위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고수하는 것이 주원인으로 꼽힌다. 미일 금리차가 3%포인트 이상 벌어지면서 투기세력의 표적이 됐다는 분석이다. 후지시로 고이치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행이 당분간 금리인상에 나서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엔화가 안심하고 투기할 수 있는 통화가 됐다"고 요미우리신문에 말했다.

원자재값 급등 여파로 무역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도 원자재를 수입하는 기업의 달러 매수 수요를 늘려 엔저를 가속화한다는 분석이다. 이날 오전 일본 재무성은 8월 무역수지가 2조8173억엔(약 27조4777억원) 적자를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19개월 연속 수입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늘면서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

"150엔까지 시장개입 없다"


엔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자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구두개입을 반복했다. 스즈키 준이치 재무상은 지난 4월 "나쁜 엔저"를 시작으로 "(엔저를 막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배제하지 않을 것" 등 발언의 수위를 높여왔다. 전날에는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며 "하게 된다면 지체없이 단숨에 실시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일본 통화당국이 구두개입을 넘어 시장개입의 직전 단계인 호가 확인까지 실시했지만 엔저 흐름이 바뀔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호가 확인 자체를 '시간 끌기'라거나 '공갈포'로 해석하는 시장 참가자도 적지 않다.

미국이 시장개입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플레와의 전쟁에 나선 미국은 물가를 낮추는 효과가 있는 달러 강세를 반기고 있다. 시장 참가자들이 미일 공동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는 이유다.

다카하시 오사무 씨티그룹증권 수석 외환 전략가는 "과거 외환시장에 실제로 개입했을 때 썼던 '단호한(断固たる)'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표현이 없었다"며 "엔화 가치가 150엔까지 떨어지지 않는 한 시장개입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직접 시장에 개입했다가 재미를 못 본 사례가 많다는 점도 일본 통화당국을 주저하게 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엔화 강세를 막기 위한 외환시장 개입은 319회 실시된 반면 엔저 방어를 위한 개입은 32회에 그쳤다. 1995년 이후 7차례의 시장 개입 가운데 엔화 약세를 막는 조치는1998년 6월 1차례 뿐이었다.

1998년 4월 달러당 엔화가치가 133엔까지 떨어지자 통화당국은 6월까지 3개월 동안 3조엔 규모의 시장개입에 나섰다. 하지만 개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8월 엔화 가치는 147엔까지 떨어졌다.

엔화를 매도하는 엔고(高) 대책과 달리 엔저 방어를 위한 시장개입은 실탄이 한정적이다. 정부가 보유한 달러를 팔아서 엔화를 사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외환보유액이 개입의 한도라는 의미다.

엔화 강세를 막기 위해 2003년 1월~2004년 3월 실시한 외환시장 개입이 35조2000억엔 규모로 실시된 반면 1998년의 엔저 방어 개입의 규모가 3조엔에 불과했던 배경이다. 8월말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2920억달러다. 이 가운데 시장에 개입할 경우 즉각 투입이 가능한 외화 예금은 20조엔어치로 파악된다.

바바 나오히코 골드만삭스 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일 금리차를 무시하고 시장개입을 실시해도 엔화 약세 트렌드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이 지켜볼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