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커지면서 31년 연속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해외 자산이 감소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산업 경쟁력 저하로 일본 경제가 불과 10년 만에 급격히 늙어버렸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분석이 나온다.
무역적자 커진 日…급격한 엔저에 400조엔 해외자산도 '흔들'

○세계 1위 대외자산 흔들

2010년 이전까지 일본 경제는 곧잘 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건물주로 묘사됐다. 많을 때는 연간 10조엔(약 97조원)이 넘는 무역 흑자(월급)를 올리는 동시에 막대한 해외 자산을 통해 매년 20조엔씩을 이자와 배당(건물 임대료)으로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매년 20조엔 안팎의 경상수지 흑자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해외 자산은 400조엔을 넘어섰다. 31년 연속 세계 1위였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일본 경제를 떠받치던 두 기둥 가운데 하나인 무역수지가 무너지면서 상황이 변했다. 일본의 올 8월 무역수지는 2조8173억엔 적자를 나타냈다. 역대 최대 규모 적자다. 일본의 무역수지는 13개월 연속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원자재값 급등과 엔화 약세로 수입이 급증한 결과다.

무역 흑자가 막을 내렸다는 것은 대기업에 다니는 건물주였던 일본이 정리해고당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회사에서 잘려서 월급만 안 나오는 게 아니다. 월급 믿고 쓴 마이너스통장과 할부금(무역적자)이 임대료(배당·이자소득)를 넘어설 지경에 이르렀다는 게 일본 경제의 현주소다. 임대료로 마이너스통장과 할부금을 못 갚는 상황이 계속되면 건물을 팔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외 자산이 줄어드는 것이다.

○급속히 늙어버린 日 경제

경상수지 적자와 대외자산 축소는 일본 경제 역시 국제수지 발전 단계설의 숙명을 피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제수지 발전 단계설은 국제수지와 대외자산 구조 변화로 국가의 흥망성쇠를 단계별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경상수지와 이를 구성하는 무역수지, 해외 자산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자·배당 소득수지 세 개 항목이 각각 흑자인지 적자인지에 따라 국가의 성장 단계를 ① 미성숙 채무국 ② 성숙 채무국 ③ 채무변제국 ④ 미성숙 채권국 ⑤성숙 채권국 ⑥채권 소진국 여섯 가지로 분류한다.

미성숙 채무국은 산업 발전을 막 시작한 나라다. 무역수지와 소득수지가 모두 적자인 상태다. 성숙 채무국은 산업이 발전해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한 단계다. 채무변제국은 산업이 한층 성장해 무역 흑자가 소득수지 적자를 웃도는 단계다. 경상수지도 흑자로 돌아선다. 미성숙 채권국은 무역수지가 정체 상태에 접어들지만 늘어난 대외 자산 덕분에 소득수지가 흑자로 전환하는 시기다. 무역수지와 서비스수지가 ‘쌍끌이 흑자’를 나타낸다.

성숙 채권국은 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떨어져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지만 대외 자산이 더욱 늘면서 소득수지 흑자도 확대되는 단계다. 경상수지 흑자도 유지된다. 최종 단계인 채권 소진국은 무역 적자 규모가 소득수지 흑자 규모를 웃돌아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는 때다. 쌓아뒀던 대외 자산도 감소한다.

무역수지와 소득수지가 쌍끌이 흑자를 기록한 2010년까지 일본은 미성숙 채권국이었다.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2010년부터 코로나19 이전까지 일본은 성숙 채권국으로 바뀌었다.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이자와 배당으로 무역 적자를 메우면서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는 국가가 됐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일본은 엔화 가치 급락에 따른 무역 적자 확대로 채권 소진국 경계에 들어섰다. 불과 10여 년 만에 일본 경제가 발전 단계설의 두 단계를 건너뛰면서 급격하게 늙어버린 것이다.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대신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의 엔저 유도를 통해 기업 실적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후유증이라는 분석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금이라도 산업 구조를 신속하게 전환하지 않으면 노화가 더욱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게 일본의 고민”이라고 분석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