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흑해항을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허용하는 협정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측 도움을 받은 우크라이나군이 드론으로 자국의 흑해함대를 공격했다는 이유를 댔다.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의 곡물 공급이 다시 끊겨 세계 식량난이 심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러시아 국방부와 외무부는 29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항구에서 농산물 수출에 관한 협정 이행의 참여를 무기한 중단한다”고 밝혔다. 11월 19일이 시한인 곡물 수출 협정 연장 논의에서 사실상 발을 빼겠다는 통보다. 러시아 측이 내세운 명분은 우크라이나군의 협정 위반이다. 우크라이나가 이날 크림반도 남서부 항구도시 세바스토폴에 있는 흑해함대를 드론으로 공격했다는 주장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키이우 정권(우크라이나)이 흑해함대와 민간 선박에 테러 공격을 가한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가 임명한 미하일 라즈보자예프 세바스토폴 시장은 이날 텔레그램을 통해 “오늘 새벽 4시20분 키이우 정권이 흑해함대와 민간 선박을 대상으로 테러 공격을 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가 테러 공격을 조작한 뒤 협박하고 있다”며 즉각 반박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화상 연설에서 “유엔과 주요 20개국(G20) 등 국제사회가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완전히 터무니없는 결정”이라며 “세계 기아 위기를 증폭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밀과 옥수수, 해바라기씨유 등의 세계 최대 수출국 중 하나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침공 탓에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길이 막히자 세계 식량시장이 요동쳤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7월 22일 인도적 차원에서 흑해를 지나는 곡물 수출 선박의 안전을 120일간 한시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의 ‘흑해 곡물 이니셔티브’ 협정을 체결했다. 유엔과 튀르키예(터키)의 중재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이 협정으로 흑해 항로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이 재개됐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자국 곡물과 비료 수출에 대한 서방의 제재 등을 일부 면제받을 수 있게 됐다.

8월 1일 첫 선박이 흑해항을 떠난 이후 우크라이나는 8월 170만t, 9월 390만t 등 곡물 수출량을 점차 늘려왔다. 10월 말 현재까지 우크라이나가 전 세계에 공급한 곡물은 900만t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전쟁 발발 이후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던 세계 식량 가격도 상당 부분 안정을 되찾았다.

러시아가 협정 참여 중단을 선언함에 따라 세계 곡물 가격이 다시 들썩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중단은 세계 곡물시장에 다시 한번 충격을 줄 수 있다”고 보도했다.

흑해항을 출발하는 곡물 선적 선박 대기량은 이달 초부터 이미 러시아의 방해로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변심이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석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 23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을 방해하기 위해 오데사 등 흑해 3개 항구의 선박 검수 등 일 처리를 의도적으로 간섭하고 있다”며 “그 결과 21일 기준으로 항구의 대기 선박이 150척에 달한다”고 밝혔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