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시간 만에 무너졌다"…SVB 파산에 실리콘밸리 '패닉'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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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 알리는 안내문 붙은 채 문은 굳게 닫혀
책상 뺀 직원 세명 나왔지만 "할 말 없어" 빠져나가
40년 전 설립된 SVB, '벤처 대출' 틈새 상품으로 성장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VC 절반 이상 이용"
"SVB 파산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패닉"
스타트업 운영자금 부족으로 당장 다음주 월급 지급도 문제
VC 신규 투자, 펀드 투자자 모집 '올 스톱'
책상 뺀 직원 세명 나왔지만 "할 말 없어" 빠져나가
40년 전 설립된 SVB, '벤처 대출' 틈새 상품으로 성장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VC 절반 이상 이용"
"SVB 파산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패닉"
스타트업 운영자금 부족으로 당장 다음주 월급 지급도 문제
VC 신규 투자, 펀드 투자자 모집 '올 스톱'
10일(현지시간) 오후 3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앞. 굳게 닫힌 문 앞에는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SVB를 폐쇄한다는 안내문만 덩그라니 붙어있었다. 잠시 뒤 직원으로 보이는 세 명이 책상을 정리한 것처럼 보이는 짐을 싸들고 문을 열고 나왔다.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라며 자리를 피했다. 이곳에 돈을 맡긴 고객 한명이 은행 측과 계속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자 자신의 다급한 상황을 담은 문서를 문 틈으로 끼워넣었다.
실리콘밸리의 성장과 함께 지난 40년을 성장해왔던 SVB가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으로 10일 무너지자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패닉'에 빠졌다. SVB에 돈을 맡겨놓은 스타트업들은 당장 운영자금 부족으로 위기에 처했고, 벤처캐피털(VC) 등 투자자들도 스타트업을 지원해주고 싶어도 추가 투자계획을 이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다음날인 9일 오전 실리콘밸리의 VC 가운데 일부는 투자한 스타트업들에 SVB에 넣은 예금을 모두 인출해야 한다고 다급하게 연락했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은 앞다퉈 예금 인출에 나섰고 그날 오전에는 일부 인출이 가능했지만 인출하려는 고객들이 몰리면서 오후부터는 거래가 먹통이 됐다. 운영자금과 투자금을 이 곳에 예치해뒀던 스타트업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렇게 하루 동안 빠져나간 예금만 420억달러에 이른다. 그날 SVB금융그룹의 주가는 60% 하락했다.
뱅크런에 SVB가 대응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미국 금융당국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10일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이 '샌타클래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B)'라는 법인을 설립해 SVB가 보유한 예금을 모두 이전받고 자산 매각을 추진할 계획이다.
SVB 파산은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지난해 말 기준 SVB의 총자산은 2090억달러, 총예금은 1754억달러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무너진 JP모건체이스의 워싱턴뮤추얼 파산 이후 두 번째다. 워싱턴뮤추얼은 당시 총자산 3070억달러, 총예금 188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한 투자자는 "스타트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SVB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틀 만에 문을 닫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특히 SVB는 신용이 부족한 창업 초기 실리콘밸리에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벤처 대출(venture debt)'이라는 실리콘밸리에 특화된 틈새 상품을 내놓고 이 지역 스타트업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대출을 해주며 스타트업의 신주인수권(워런트)을 일부 받는 방식이다. 신용을 쌓지 못한 스타트업들은 일반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힘들었지만 SVB를 찾아가면 벤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VC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쌓아갔다. 최고로 평가받는 VC가 투자한 스타트업에 더 많은 대출을 해줬다.
그렇게 대출을 받은 스타트업들은 SVB에 계좌를 열었고, VC들도 벤처펀드의 투자금을 SVB 계좌에 보관했다. 실리콘밸리의 한 투자자는 "SVB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의 중심에 있는 은행"이라며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과 VC 가운데 절반은 SVB와 거래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실리콘밸리 VC의 70%가 SVB와 거래하고 있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특히 SVB의 파산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 더 충격이 크다. 또다른 VC 관계자는 "VC는 리스크 평가를 통해 투자하는 게 사업의 본질"이라며 "모든 리스크의 현실화 가능성을 놓고 고민해봤지만 SVB의 파산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투자자와 스타트업들은 10일 하루 종일 정신 없는 시간을 보냈다. 스타트업들은 예금 인출을 시도하다가 은행이 폐쇄된 뒤 향후 대책 마련을 위한 긴급 회의를 열었고, VC들은 펀드에서 투자한 스타트업들이 SVB와 얼마나 거래하고 있는지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는 어떤지 파악하는 데 분주했다. 벤처펀드에 출자한 투자자들도 현재 현황과 향후 피해를 예상하느라 긴급 회의를 수차례 열고 대책 마련에 집중했다.
특히 투자금이 떨어져 올해 초 신규투자금을 유치하려고 계획했거나 투자 라운드를 진행중인 스타트업들은 심각하다. 은행에 넣어놓은 자금이 묶여있는 상황에서 운영자금 부족으로 유동성 위기가 올 수 밖에 없다. 당장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미국 기업들은 한 달에 두번 월급을 지급한다. 통상 15일과 월말이다. 바로 다음주에 월급을 줘야하는 기업들이 많다. 월급을 주지 못하면 노동법 위반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 VC 관계자는 "VC들도 기존에 투자해놓은 스타트업을 도와주는 데 집중하지 당분간은 새로운 신규 투자처를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VC들도 SVB에 가용자금이 묶이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VC는 "신규 투자를 위해 출자자로부터 돈을 받아 SVB에 넣어놨는데 꺼낼 수 없게 됐다"며 "추가 투자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벤처펀드를 새로 결성하려고 해도 당분간은 투자자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는 "벤처 생태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굳이 벤처펀드에 신규 투자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특히 기준금리가 이렇게 올라가는 상황에서 대체투자로 분류되는 벤처 투자를 늘려야할 동인이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실리콘밸리=서기열 특파원 philos@hankyung.com
실리콘밸리의 성장과 함께 지난 40년을 성장해왔던 SVB가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으로 10일 무너지자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패닉'에 빠졌다. SVB에 돈을 맡겨놓은 스타트업들은 당장 운영자금 부족으로 위기에 처했고, 벤처캐피털(VC) 등 투자자들도 스타트업을 지원해주고 싶어도 추가 투자계획을 이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뱅크런으로 44시간 만에 무너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40년 동안 성장해온 SVB가 폐쇄되는 데는 44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난 8일 오후 늦은 시간 SVB는 투자했던 장기 채권 210어달러어치를 매각해 18억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고객의 예금 인출에 대응하기 위한 현금을 확보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22억5000만달러 규모의 증자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고객들의 예금인출은 가속화됐다.다음날인 9일 오전 실리콘밸리의 VC 가운데 일부는 투자한 스타트업들에 SVB에 넣은 예금을 모두 인출해야 한다고 다급하게 연락했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은 앞다퉈 예금 인출에 나섰고 그날 오전에는 일부 인출이 가능했지만 인출하려는 고객들이 몰리면서 오후부터는 거래가 먹통이 됐다. 운영자금과 투자금을 이 곳에 예치해뒀던 스타트업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렇게 하루 동안 빠져나간 예금만 420억달러에 이른다. 그날 SVB금융그룹의 주가는 60% 하락했다.
뱅크런에 SVB가 대응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미국 금융당국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10일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이 '샌타클래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B)'라는 법인을 설립해 SVB가 보유한 예금을 모두 이전받고 자산 매각을 추진할 계획이다.
SVB 파산은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지난해 말 기준 SVB의 총자산은 2090억달러, 총예금은 1754억달러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무너진 JP모건체이스의 워싱턴뮤추얼 파산 이후 두 번째다. 워싱턴뮤추얼은 당시 총자산 3070억달러, 총예금 188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한 투자자는 "스타트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SVB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틀 만에 문을 닫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중심" 파산 '충격'
SVB의 파산은 실리콘밸리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SVB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결됐기 때문이다. SVB에 따르면 미국 테크·헬스케어 벤처기업 가운데 44%가 SVB의 고객이다. 2009년 이후 약 2300억규모의 투자 유치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벤처기업으로 꼽히는 에어비앤비, 우버, 링크드인 등을 비롯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해 세계 최대 통신장비업체로 성장한 시스코의 초기에 자금을 지원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특히 SVB는 신용이 부족한 창업 초기 실리콘밸리에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벤처 대출(venture debt)'이라는 실리콘밸리에 특화된 틈새 상품을 내놓고 이 지역 스타트업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대출을 해주며 스타트업의 신주인수권(워런트)을 일부 받는 방식이다. 신용을 쌓지 못한 스타트업들은 일반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힘들었지만 SVB를 찾아가면 벤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VC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쌓아갔다. 최고로 평가받는 VC가 투자한 스타트업에 더 많은 대출을 해줬다.
그렇게 대출을 받은 스타트업들은 SVB에 계좌를 열었고, VC들도 벤처펀드의 투자금을 SVB 계좌에 보관했다. 실리콘밸리의 한 투자자는 "SVB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의 중심에 있는 은행"이라며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과 VC 가운데 절반은 SVB와 거래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일부에서는 실리콘밸리 VC의 70%가 SVB와 거래하고 있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특히 SVB의 파산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 더 충격이 크다. 또다른 VC 관계자는 "VC는 리스크 평가를 통해 투자하는 게 사업의 본질"이라며 "모든 리스크의 현실화 가능성을 놓고 고민해봤지만 SVB의 파산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투자자와 스타트업들은 10일 하루 종일 정신 없는 시간을 보냈다. 스타트업들은 예금 인출을 시도하다가 은행이 폐쇄된 뒤 향후 대책 마련을 위한 긴급 회의를 열었고, VC들은 펀드에서 투자한 스타트업들이 SVB와 얼마나 거래하고 있는지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는 어떤지 파악하는 데 분주했다. 벤처펀드에 출자한 투자자들도 현재 현황과 향후 피해를 예상하느라 긴급 회의를 수차례 열고 대책 마련에 집중했다.
"엎친 데 덮친 격" 신규 투자 막혀
SVB 파산으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은 향후 어려운 시간을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기준금리 인상과 이에 따른 주식시장 하락으로 스타트업들은 투자금을 유치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특히 작년 하반기 이후에는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존 기업가치보다 낮춰서 투자금을 모집하는 스타트업들도 속속 등장했다. 기존에 받은 투자금을 운영자금으로 써야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이런 상황에 SVB마저 파산하면서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은 유동성 위기에 처하게 됐다. 투자금이 말라버린 상황에서 기존 자금마저 꺼내쓸 수 없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특히 투자금이 떨어져 올해 초 신규투자금을 유치하려고 계획했거나 투자 라운드를 진행중인 스타트업들은 심각하다. 은행에 넣어놓은 자금이 묶여있는 상황에서 운영자금 부족으로 유동성 위기가 올 수 밖에 없다. 당장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미국 기업들은 한 달에 두번 월급을 지급한다. 통상 15일과 월말이다. 바로 다음주에 월급을 줘야하는 기업들이 많다. 월급을 주지 못하면 노동법 위반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 VC 관계자는 "VC들도 기존에 투자해놓은 스타트업을 도와주는 데 집중하지 당분간은 새로운 신규 투자처를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VC들도 SVB에 가용자금이 묶이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VC는 "신규 투자를 위해 출자자로부터 돈을 받아 SVB에 넣어놨는데 꺼낼 수 없게 됐다"며 "추가 투자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벤처펀드를 새로 결성하려고 해도 당분간은 투자자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는 "벤처 생태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굳이 벤처펀드에 신규 투자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특히 기준금리가 이렇게 올라가는 상황에서 대체투자로 분류되는 벤처 투자를 늘려야할 동인이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실리콘밸리=서기열 특파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