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들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의 설립자인 짐 허버트 회장은 지난해 11월 확신에 찬 어투로 얘기했다. "부자 고객들은 이자 더 준다고 다른 은행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평소 믿음을 직원들에게 다시 한 번 주지시킨 것이다.

그는 전체 직원 회의에서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치며 "더 많은 예금을 유치해야 한다"고 큰 소리를 쳤다. 미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4회 연속 0.75%포인트씩 올려 금융시장이 요동치던 때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허버트 회장은 불안해하는 투자자들에게 "고객들이 더 부유해지면서 예금을 늘리고 대출도 늘리면서 친구들을 데려온다"며 "이건 복잡한 사업 모델이 아니며 모든 환경에서 작동한다"고 강조했다.

198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혈혈단신으로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을 설립한 뒤 30여년만에 미국 내 14위 은행으로 성장시킨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허버트 회장은 미국 내 주요 거점 도시의 고액 자산가를 핵심 고객층으로 끌어들여 그 어떤 불황에도 사업 기반이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Fed의 초고속 금리 인상이 튼튼해 보이던 고객 기반에 균열을 냈다. 특히 올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은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의 핵심 고객층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 은행의 예금은 며칠 만에 반토막이 났다.

사진=월스트리트저널
사진=월스트리트저널
허버트 회장(사진)은 뒤늦게 "예금금리를 올려서라도 더 많은 예금을 유치하라"고 직원들을 다그쳤지만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을 막지 못했다. 미국 대형 은행 11곳이 퍼스트리퍼블릭은행 파산을 막기 위해 300억달러를 지원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흐름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난달 24일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의 1분기 실적 발표 때 순수 예금 인출액이 1020억달러(약 137조원)로 나타나면서 이 은행의 주가는 75% 이상 폭락했다. 2021년 11월 이 은행의 시가총액은 400억달러였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는 그 가치가 5억5700만달러로 급감했다. 시총이 최고점 대비 1.4%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미국 금융당국은 극약처방을 쓸 수밖에 없었다. 1일(현지시간) 새벽 3시30분께 미국 최대은행인 JP모건에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을 강제 매각토록 결정했다. 대형 은행 붕괴라는 악재가 이날 증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꼭두새벽에 매각 소식을 공표했다. 동시에 2008년 워싱턴뮤추얼에 이어 미국 은행 역사상 두번째로 자산 규모가 큰 은행의 몰락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퍼스트리버블릭 은행의 실패는 미국 은행 업계에서 최고의 성공 방정식으로 인식되던 '부자들 예금 유치 후 5성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략'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WSJ는 "지금 생각하면 명명백백해보이지만 지난해만 해도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은 Fed의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도 잘 버텨낼 것이라고 착각했다"며 "이미 은행의 경영은 기울어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