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붐에 생명 위협 받는 100원짜리 동전 [원자재 이슈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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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니켈 노리고 동전 녹이는 '검은 손'
아프리카에선 구리 대신 철로 주화 만들기도
구리로 만든 주화인 동전(銅錢)이 세계 곳곳에서 위협받고 있다. 구리와 니켈을 노린 검은 손 때문이다. 구리와 니켈 합금인 백동은 한국의 100원·500원짜리를 비롯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소재다. 아르헨티나에선 최근 SNS를 통해 2페소 동전을 고물상에 팔면 액면가의 6배인 12페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달러화 대비) 가 5년 만에 10분의 1토막이 나며 빚어진 일이다. 과거 인도 5루피 동전이 방글라데시로 밀수출돼 면도날로 만들어져 팔리는 일도 있었다.
구리는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금속이며, 매장량이 풍부한데다 항균 기능이 있어 주화의 재료로로 널리 쓰인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등한 구리와 니켈의 가격이 주화의 액면가를 넘어서는 사례가 확산하고 있다. 산업에서 구리와 니켈을 대체할 금속 기술이 개발되거나 채굴량이 획기적으로 늘지 않는다면, 동전을 녹이는 범죄가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금과 은에 이어 동 주화도 사라질 위기다.
원자재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화폐 가치가 안정적인 선진국에서도 금속 원가가 동전의 '멜팅포인트'(녹는점=금속 가치가 화폐 액면가를 초과)를 넘어서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미 조폐국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니켈(5센트 동전·백동화) 1개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10.4센트로, 2020년 7.4센트에서 40.2% 늘어났다. 무게 5g인 5센트 동전은 구리 3.75g과 니켈 1.25g으로 만들어졌다. 아직 고물상에 동전을 팔 정도는 아니지만 원자재 가격이 더 오르면 5센트 동전이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미 조폐국은 값싼 금속으로 만들어진 새 동전을 발행할 계획을 세우고 상원에 법안 통과를 요청했다.
업자들은 주로 구리를 노리고 동전을 수집해 녹여 판다. 구리는 전자제품 뿐 아니라 전선 등 제조가 간단한 제품에 광범위하게 쓰이기 때문에 처분하기 쉽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2010년대 중반까지 들어 구리·아연 합금으로 만든 4.06g짜리 옛 10원짜리를 밀수출하거나 녹여서 파는 범죄가 성행했다. 2017년 경찰에 잡힌 일당은 10원짜리 동전 7억원어치를 녹여 20억을 챙겼다. 결국 2006년 한국은행은 10원짜리를 크기와 무게를 줄인 알루미늄·구리 합금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현재 불과 구리(48%)와 알루미늄(52%)으로 만든 1.22g짜리 동전 제조 원가도 액면가의 두 배 이상이 됐다. 중국과 아프리카에선 동전 대신 도금한 철 주화를 사용하기도 한다. 영국도 10펜스 이하는 철로 만든 주화를 사용한다. 베네수엘라에선 철 주화까지도 대량으로 수집돼 고물상에 팔려 사라지고 있다. 화폐를 마구 찍어낸 탓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베네수엘라에선 종이돈의 가치가 종잇값과 잉크값보다 낮아질 정도다. 동전의 액면 가치는 0에 수렴했다.
주요 구리 생산국의 상황도 좋지 않다. 전 세계 구리의 4분의 1 이상을 공급하는 최대 생산국 칠레는 최근 채굴이 급감하고 있다. 칠레 국영 광산기업 코델코는 작년 생산량이 전년 대비 11% 급감한 145만t으로 25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올해는 131만~135만 t으로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광산의 노후화가 심각한데다 오랜 가뭄으로 물 사용이 제한되면서 채굴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최대 광산인 엘테니엔테에서 대규모 암석 폭발사고까지 발생했다.
전 세계 구리 공급량의 10%를 차지하는 페루는 정치적 불안정이 심각하다. 작년 12월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시위가 그치지 않고 있다. '부패 없는 나라'를 약속하고 2021년 당선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공무집행방해, 논문 표절 등 다양한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물러나 멕시코로 망명했다. 디나 볼루아르테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페루는 반정부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구리 채굴을 하던 글렌코어는 올해 초 시위대의 약탈과 방화 이후 안타파카이 광산 운영을 중단했다.
니켈의 생산은 인도네시아 등에서 늘고는 있지만, 시장이 불안정하다. 지난해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자 리튬을 공매도했던 중국 칭산그룹 등이 물량을 구하려 덤빈 탓에 시세가 순식간에 2.5배 가량 치솟았다. 가격이 한 때 t당 10만달러를 넘기도 했다. 혼란 속에서 런던금속거래소(LME)는 거래를 일시 중단했고, 이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헤지펀드 엘리엇은 LME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LME가 흔들리는 동안 인도네시아산 저순도 니켈이 별도의 시장을 형성하며 낮은 가격에 팔리는 등 거래 전반이 혼탁하다.
올초엔 인도 TMT메탈, UD트레이딩 그룹 등으로부터 니켈을 구매한 원자재 중개사 트라피구라가 돌이 든 컨테이너를 받는 황당한 사기 사건도 벌어졌다. 트라피구라는 니켈인줄 알고 중국 등 고객사에 돌을 인도해 신뢰가 훼손되는 등 5억7700만달러(약 73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아프리카에선 구리 대신 철로 주화 만들기도
구리로 만든 주화인 동전(銅錢)이 세계 곳곳에서 위협받고 있다. 구리와 니켈을 노린 검은 손 때문이다. 구리와 니켈 합금인 백동은 한국의 100원·500원짜리를 비롯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소재다. 아르헨티나에선 최근 SNS를 통해 2페소 동전을 고물상에 팔면 액면가의 6배인 12페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달러화 대비) 가 5년 만에 10분의 1토막이 나며 빚어진 일이다. 과거 인도 5루피 동전이 방글라데시로 밀수출돼 면도날로 만들어져 팔리는 일도 있었다.
구리는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금속이며, 매장량이 풍부한데다 항균 기능이 있어 주화의 재료로로 널리 쓰인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등한 구리와 니켈의 가격이 주화의 액면가를 넘어서는 사례가 확산하고 있다. 산업에서 구리와 니켈을 대체할 금속 기술이 개발되거나 채굴량이 획기적으로 늘지 않는다면, 동전을 녹이는 범죄가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금과 은에 이어 동 주화도 사라질 위기다.
동전 멜팅 포인트(Melting point) 넘은 금속 원자재 값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서 구리 선물 가격은 파운드당 3.88달러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해 치솟았던 구릿값은 중국의 회복이 부진한 탓에 2분기부터 폭락했음에도 아직 팬데믹 이전보다 35% 이상 높은 수준이다. 니켈 가격도 마찬가지로 t당 2만1000달러 이상으로 팬데믹 이전에 비해 1.5배가량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원자재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화폐 가치가 안정적인 선진국에서도 금속 원가가 동전의 '멜팅포인트'(녹는점=금속 가치가 화폐 액면가를 초과)를 넘어서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미 조폐국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니켈(5센트 동전·백동화) 1개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10.4센트로, 2020년 7.4센트에서 40.2% 늘어났다. 무게 5g인 5센트 동전은 구리 3.75g과 니켈 1.25g으로 만들어졌다. 아직 고물상에 동전을 팔 정도는 아니지만 원자재 가격이 더 오르면 5센트 동전이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미 조폐국은 값싼 금속으로 만들어진 새 동전을 발행할 계획을 세우고 상원에 법안 통과를 요청했다.
업자들은 주로 구리를 노리고 동전을 수집해 녹여 판다. 구리는 전자제품 뿐 아니라 전선 등 제조가 간단한 제품에 광범위하게 쓰이기 때문에 처분하기 쉽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2010년대 중반까지 들어 구리·아연 합금으로 만든 4.06g짜리 옛 10원짜리를 밀수출하거나 녹여서 파는 범죄가 성행했다. 2017년 경찰에 잡힌 일당은 10원짜리 동전 7억원어치를 녹여 20억을 챙겼다. 결국 2006년 한국은행은 10원짜리를 크기와 무게를 줄인 알루미늄·구리 합금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현재 불과 구리(48%)와 알루미늄(52%)으로 만든 1.22g짜리 동전 제조 원가도 액면가의 두 배 이상이 됐다. 중국과 아프리카에선 동전 대신 도금한 철 주화를 사용하기도 한다. 영국도 10펜스 이하는 철로 만든 주화를 사용한다. 베네수엘라에선 철 주화까지도 대량으로 수집돼 고물상에 팔려 사라지고 있다. 화폐를 마구 찍어낸 탓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베네수엘라에선 종이돈의 가치가 종잇값과 잉크값보다 낮아질 정도다. 동전의 액면 가치는 0에 수렴했다.
탈탄소화 전환, 구리 수요↑ 생산은 지지부진
탈탄소 전환 속도가 빨라지고, 전기차와 친환경 발전 인프라에 구리와 니켈이 대량으로 쓰이면서 동전을 모아 녹이는 행태가 성행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전기차엔 내연기관 차량의 두 배 이상의 구리가 들어간다. 승용차는 차량 크기와 기술력에 따라 50~80kg 정도의 구리가 쓰인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원자재 리포트에서 "현재 2500만t 정도인 연간 구리 수요가 2035년엔 5000만t에 이를 수 있다"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지난해 원자재 대란이 벌어진 이후 곳곳에서 앞으로 구리 부족 현상이 만성화될 것이란 경고도 이어졌다.주요 구리 생산국의 상황도 좋지 않다. 전 세계 구리의 4분의 1 이상을 공급하는 최대 생산국 칠레는 최근 채굴이 급감하고 있다. 칠레 국영 광산기업 코델코는 작년 생산량이 전년 대비 11% 급감한 145만t으로 25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올해는 131만~135만 t으로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광산의 노후화가 심각한데다 오랜 가뭄으로 물 사용이 제한되면서 채굴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최대 광산인 엘테니엔테에서 대규모 암석 폭발사고까지 발생했다.
전 세계 구리 공급량의 10%를 차지하는 페루는 정치적 불안정이 심각하다. 작년 12월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시위가 그치지 않고 있다. '부패 없는 나라'를 약속하고 2021년 당선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공무집행방해, 논문 표절 등 다양한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물러나 멕시코로 망명했다. 디나 볼루아르테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페루는 반정부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구리 채굴을 하던 글렌코어는 올해 초 시위대의 약탈과 방화 이후 안타파카이 광산 운영을 중단했다.
불안정한 니켈 시장
니켈을 노린 대규모 동전 수집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에는 동전을 밀수해 구리 뿐 아니라 니켈을 뽑아내는 공장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니켈은 1년 소비량이 277만t에 불과한 마이너한 금속이지만, 세계에서 자원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특정 국가라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할지 모른다.니켈의 생산은 인도네시아 등에서 늘고는 있지만, 시장이 불안정하다. 지난해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자 리튬을 공매도했던 중국 칭산그룹 등이 물량을 구하려 덤빈 탓에 시세가 순식간에 2.5배 가량 치솟았다. 가격이 한 때 t당 10만달러를 넘기도 했다. 혼란 속에서 런던금속거래소(LME)는 거래를 일시 중단했고, 이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헤지펀드 엘리엇은 LME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LME가 흔들리는 동안 인도네시아산 저순도 니켈이 별도의 시장을 형성하며 낮은 가격에 팔리는 등 거래 전반이 혼탁하다.
올초엔 인도 TMT메탈, UD트레이딩 그룹 등으로부터 니켈을 구매한 원자재 중개사 트라피구라가 돌이 든 컨테이너를 받는 황당한 사기 사건도 벌어졌다. 트라피구라는 니켈인줄 알고 중국 등 고객사에 돌을 인도해 신뢰가 훼손되는 등 5억7700만달러(약 73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