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 과몰입 현상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데 한국 의학계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게임 중독을 다룬 논문을 가장 많이 발표한 국가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논문의 내용을 둘러싼 뒷말도 무성하다. 과학적 근거가 부실한 논문이 많다는 주장이다.
WHO '게임 중독=질병' 근거로 사용된 한국 논문
게임에 부정적인 韓 의학계

게임산업의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27일 “한국의 일부 의사들이 국내에서 게임 규제를 강화하는 데 실패하자 WHO를 조직적으로 공략했다”며 “이들이 WHO의 결정이 나오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2013년 정신과 의사 출신인 신의진 전 국회의원은 게임을 알코올, 마약, 도박처럼 규정하는 내용을 담은 ‘중독 예방 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 개정안’(일명 4대 중독법)을 대표발의했다. 당시 한국중독정신의학회는 해당 법안을 ‘반드시 입법화를 이뤄내야 할 숙원사업’이라며 학회 회원들에게 공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련 법안은 논란 끝에 폐기됐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4대 중독법의 국회 통과가 어려워지자 의학계 인사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WHO의 이번 결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관련 논문 수를 보면 한국이 1위다. 연세대 산학협력단이 최근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제출한 ‘게임과몰입 연구에 대한 메타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5년 동안 게임 중독, 게임 과몰입 등을 다룬 국내외 논문 614개 중 한국에서 나온 논문이 91개로 가장 많았다. 전체의 13.4%를 차지했다. 다음은 중국(85개), 미국(83개), 독일(64개), 호주(38개) 등의 순이다. 인구 대비 비율로 한국이 중국과 미국의 수십 배에 달한다.

한국 논문은 정신의학계에서 작성한 비중이 59.3%로 절반 이상이었다. 글로벌 평균(28.4%)의 두 배 수준이다. 또 국내 논문 대부분이 지나친 게임 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쓰였다. 전체의 89.0%가 게임 과몰입 현상에 동의했을 정도다. 미국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54.2%만 게임 과몰입 현상이 실재한다고 봤다.

한국 논문의 정부 지원 비중도 높았다. 82.4%의 논문이 정부 지원으로 작성됐다. 한국연구재단(35개)과 보건복지부(23개),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17개) 등이 스폰서 역할을 했다. 보고서는 “정부의 연구비 지원 내역이 게임 과몰입과 게임중독, 게임장애에 대한 국가별 견해의 차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상당수 논문 “수준 이하”

한국 논문들의 수준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체 논문의 8.2%만 조사한 게임 이름을 1개 이상 명시했다.

연세대 산학협력단은 “대부분 게임을 지정하지 않은 채 연구 대상을 추상화했다”며 “구체적으로 어떤 게임이 게임과몰입 및 중독과 연관이 있는지 구분하지 않고 연구 방향을 설정했다”고 꼬집었다.

의학과 무관하거나 관련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의학적 문제로 간주한 사례가 많다는 점도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이경민 서울대 인지과학연구소장 역시 “우리가 흔히 쓰는 ‘게임중독’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질병으로 치부하는 ‘의료화 현상’의 폐해”라고 말했다.

게임업계에서는 의학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게임 사용자들을 환자로 만든다고 반발하고 있다. 남궁훈 카카오게임즈 대표는 최근 페이스북에 “정신과 의사들은 많은 사람들을 환자로 만들어야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게임에 몰입하는 것은 현상이지 원인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유럽,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등 세계 게임산업협회와 단체 아홉 곳은 이날 공동 성명을 냈다.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안에 ‘게임이용장애’를 포함하는 결정을 재고해달라”는 게 성명의 골자다. 이들은 “WHO가 학계의 동의 없이 결론에 도달한 것이 우려스럽다”며 “이번 조치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부를 수 있다”고 염려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