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신축년이 밝았습니다. 희망한 한 해를 기원하며 이번 호에서는 면역항암제 이후 이렇다 할 연구가 없던 항암 분야의 ‘라이징 스타’ KRAS 단백질에 대해서 다뤄봅니다.

항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라스(Ras) 단백질’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세포 분열의 신호탄과 같은 단백질로, Ras 단백질이 일으키는 인산화 연쇄반응은 ‘Ras 신호전달경로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로는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일반생물학 전공서적에서도 가장 복잡한 신호전달 경로로 악명이 높죠.

복잡한 경로이기는 하지만 세포를 증식시키는 가장 확실한 경로였기 때문에 30년 이상 제약계에서 탐내던 항암제 타깃이었습니다. Ras 단백질 중에서도 KRAS는 가장 눈독을 들이는 표적이었죠. Ras 단백질에는 KRAS, NRAS, HRAS가 있는데, Ras 단백질 변이로 발생한 종양 중 무려 85%가 KRAS가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KRAS의 활성을 억제하는 물질을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암젠, 30년간 정복하지 못한 악명의 KRAS에 도전

30년이 넘게 과학자들이 KRAS에 매달렸음에도 신약 개발에 진척이 없었던 건 이 단백질이 너무 ‘매끈’했기 때문입니다. 레고를 떠올려보면 간단합니다. 레고 블록이 쓰러지지 않고 모양을 유지하는 건 블록마다 홈이 있기 때문입니다. 블록 표면이 매끈하다면 금방 쓰러지고 말겠죠. KRAS는 홈(포켓)이 없는 블록인 셈입니다. 약물이 KRAS의 활성을 억제하려면 일단 가서 붙어야 하는데 붙을 곳이 없는 거죠. 그래서 제약업계에서 KRAS는 ‘약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undruggable)’한 존재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다국적 제약사 암젠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KRAS 저해제인 ‘소토라십(AMG510)’에 대한 허가 신청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FDA가 항암제의 신속한 허가를 위해 마련한 ‘실시간 항암 심사(RTOR·Real-Time Oncology Review)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해 가속심사를 신청한 것입니다. 이 심사는 신속 승인의 일종으로, 임상완료 전에 데이터 일부를 먼저 검토해 빠르게 승인을 내주는 제도입니다.

암젠은 지난해 10월 ‘유럽종양학회(ESMO)’에서 임상 1상의 전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비소세포폐암 환자 59명 중 종양의 크기가 줄어든 비율(객관적반응률·ORR)은 32.2%였고, 더 이상 질병이 더 진행하지 않는 비율(질병통제율·DCR)은 88.1%였습니다. 암젠은 임상 2상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으며 구체적인 수치는 올해 1월 ‘세계폐암학회(IASLC)’에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여러 돌연변이 중 KRAS G12C를 선택한 이유

암젠은 2019년 10월 항암 후보물질인 AMG510에 대한 정보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임상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AMG510은 KRAS의 G12C 돌연변이를 표적해 활성을 억제합니다. Ras 단백질에는 KRAS, NRAS, HRAS가 있는데요. Ras 단백질 변이로 인한 발생한 종양 중 85%는 KRAS가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KRAS 돌연변이 중에는 G12D가 41%, G12V가 28%, G12C가 14%를 차지했습니다. 암젠은 왜 좀 더 변이 비율이 높은 G12D나 G12V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암젠 연구진이 발표한 네이처 논문 초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KRAS는 가장 빈번하게 변이가 일어나는 종양 유발 유전자이며, 종양에서 핵심 신호전달 단백질 정보를 가지고 있다. KRAS(G12C) 돌연변이는 공유결합 억제제(Covalent inhibitor)가 잘 결합할 수 있는 시스테인 잔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결합 상호작용을 통해 효능과 선택성을 높이도록 억제제를 최적화했다. 우리의 노력은 최초의 KRAS(G12C) 억제제인 AMG 510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다.

눈치가 빠른 독자는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암젠이 G12C 돌연변이를 선택한 건 ‘시스테인 잔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스테인 단백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아미노산 중 하나입니다. 시스테인은 반응성이 큰 아미노산에 속하기 때문에 이를 공략하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거죠.

G12C 돌연변이는 글리신이라는 아미노산이 시스테인으로 바뀐 돌연변입니다. 시스테인은 암을 유발한 ‘문제아’인 동시에 약물이 결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은인’인 셈입니다.

이 논문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KRAS G12D 돌연변이에 대해서도 AMG510이 어느정도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우스 모델을 대상으로 한 전임상 결과이기는 하지만, AMG510은 KRAS(G12D)의 종양 성장을 억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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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젠이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서 다행이지만, 아마 임상 중에는 연구진들도 많이 마음을 졸였을 겁니다. 1990년대 후반 여러 제약사들이 Ras 단백질을 타깃으로 한 신약 개발에서 처참하게 참패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암젠이 Ras 단백질에 도전을 한 건 2013년 케반 쇼캇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 때문이었습니다. 쇼캇 교수가 처음으로 KRAS(G12C)의 시스테인 잔기에 달라붙는 물질을 발견한 것입니다.

쇼캇 교수는 특정 구조를 가진 물질이 KRAS(G12C)의 시스테인에 결합하자 알 수 없는 홈(포켓)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약물이 붙을 곳을 발견한 거죠. 이 발견을 통해 KRAS 억제제의 개발 가능성을 엿본 여러 제약사들은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암젠은 현재 FDA에 허가 심사를 신청했고, 650명의 고형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3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빠르게 암젠을 쫓고 있는 미라티 테라퓨틱스는 임상 2상을 진행 중으로 올해 하반기 FDA 신청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모더나와 머크는 G12C, G12D, G12D, G12V 등 다양한 돌연변이를 표적으로 하는 mRNA 암백신을 개발 중입니다. 프로탁(PROTAC) 기술을 이용한 KRAS 타깃의 항암제 개발도 연구 단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암젠의 AMG510이 허가 심사가 나고, 환자들에게 뛰어난 항암 효과를 보인다면 면역항암제 이후 다소 침체돼 있던 항암제 신약 개발이 다시 활성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Ras 단백질 타깃 신약 개발의 참패 역사?

1980년대 말 Ras 단백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Ras 단백질이 파르네실화(farnesylation)돼야 종양이 증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Ras 단백질이 세포 증식을 시키려면 세포막에 붙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지질 꼬리가 필요합니다. 이 꼬리가 파르네실화되면서 Ras 단백질에 붙게 되는 것이죠.

이 작용을 막기 위해 파르네실 전달효소 저해제(FTIs·Farnesyl Transferase Inhibitors)를 이용하는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2000년대 초 마우스 모델과 인간의 암세포에서 세포증식이 억제되는 것이 밝혀졌고, 많은 제약사들이 FTIs를 타깃으로 한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참혹했습니다. 모든 임상은 줄줄이 실패했고, 원인은 찾던 과학자들은 FTIs를 억제해도 다른 메커니즘으로 지질 꼬리를 Ras 단백질에 붙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년간 Ras 단백질은 ‘이름을 불러서는 안되는 자’처럼 제약계의 기피 대상이 됐던 겁니다.

최지원 기자 jwchoi@hankyung.com


사진. AMG510의 작용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