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 리포트] 중개의학과 제브라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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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윤성 IBS 유전체 항상성연구단 연구위원
현재 많은 질병의 원인이 밝혀진 건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해석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 덕분이다. 이와 같은 생물정보학은 중개의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고, 이 발전에는 작은 물고기 ‘제브라피시’가 한몫을 했다. 제브라피시가 어떻게 중개의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 알아봤다.
2021년 기준 대한민국 평균수명이 83세를 기록했다. 110여 년 전 22세에 불과했던 평균수명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단연 의료기술의 비약적 발전 덕분이다. 질병의 진단·치료·예방에는 환자의 임상 정보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생명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생명현상에 대한 기초과학의 연구결과를 임상의학에서 실제 사용할 수 있도록 연계하는 학문을 ‘중개의학(Translational Medicine)’이라 한다. 중개의학은 다양한 분야의 기초과학 지식을 통해 포괄적으로 임상효과를 높인다. 21세기 초 인간 유전자 지도를 해석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로 대표되는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발전이 중개의학의 초석이 되었다. 유전자 연구의 라이징스타, 제브라피시
생물정보학은 질병의 유전적 원인 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질병과 유전자 사이의 상관관계가 밝혀지면, 해당 유전자와 실제 질병의 구체적 연관성을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현대 생물학은 세포부터 고등동물까지 다양한 수준의 실험적 접근법을 사용한다. 여기에 2cm 가량의 조그마한 열대 물고기가 대활약을 펼치고 있다. 얼룩말(zebra)처럼 검은 줄무늬를 지닌 물고기, ‘제브라피시(zebrafish)’다.
제브라피시(또는 다니오제브라)는 수족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어종으로, 학명은 다니오 레리오(Danio Rerio)다.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이 용이하며, 좁은 공간에서 대량사육도 가능하다. 척추동물로서 뇌, 심장, 간 등 인간이 지닌 기관을 갖고 있으며, 온몸이 투명해 배아 발달 및 약물의 체내 반응 과정을 육안으로 살필 수도 있다. 이러한 장점들 때문에 차세대 실험동물로 각광받는다.
제브라피시는 1970년대부터 실험동물로 활용되었다. 미국 오리건 대학의 조지 스트레이싱어 교수가 관상용 제브라피시와 인도가 원산지인 제브라피시를 교배하여 최초로 실험용 모델을 제작해냈다. 1990년대 들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유럽의 뉘슬라인 볼하르트 교수와 미국의 볼프강 드리에베르 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은 제브라피시를 이용하여 최초의 대규모 유전자 기능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진은 초파리 유전연구에서 사용된 무작위 돌연변이 유발(random mutagenesis)을 이용해 돌연변이 4000여 개를 제작했다. 이렇게 제작한 각 돌연변이의 표현형 연구를 통해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규명해냈다.
과학계에 제브라피시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논문 저자 대부분이 현재 전 세계 명문대학에 소속되어 질병연구의 석학으로 인정받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2010년대에는 제브라피시유전자의 80%가량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제브라피시를 통해 인간 유전자의 기능과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게 됐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제브라피시의 과학적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제브라피시가 밝힌 여러 질병
유전자 기능을 규명하는 가장 명쾌한 방법은 ‘유전자 기능 저해’다. 한마디로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없앤 후 이상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령 유전자 X를 저해했을 때 적혈구 세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유전자 X가 적혈구 발생에 필요함을 의미한다. 제브라피시는 이 방식에 최적화된 3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척추동물로서는 드물게 특정 생명현상과 관련된 새로운 유전자를 찾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무작위 돌연변이’를 적용할 수 있다. 번식이 용이하고 유생 크기가 작아 대규모 표현형 스크리닝이 가능하고 유전체 정보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포유류와 달리 체외수정을 하기 때문에 수정란 단계에서 유전자 저해 기능 물질을 주입하여 해당 유전자의 기능을 신속하게 분석할 수 있다.
셋째, 유전자가위와 같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원하는 유전자의 기능을 골라 정확하게 영구 저해할 수 있다.
제브라피시 질병 모델은 질병 관련 후보 유전자를 변이·억제·과발현시켜 제작한다. 이는 대사질환, 염증 및 감염질환, 암 등 질병 기전의 과학적 규명에 이용되고 있다. 특히 당뇨병 및 비만 관련 유전자를 찾고, 비소와 같은 환경요인이 지방간 등 대사질환에 악영향을 끼침을 밝혀냈다. 암 분야에서도 제브라피시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뇌, 혈액, 피부 등 다양한 기관 특이적 암과 관련 유전자 기능을 찾아내고 있다. 제브라피시 덕분에 환자 맞춤형 항암 치료의 가능성도 높아졌다.
환자의 암세포를 제브라피시에 배양한 암 아바타 모델에 다양한 항암 치료를 적용하면, 어떤 치료법이 적합한지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기존 치료제에 내성을 보이는 환자에게 새로운 해결법을 제공한다. 암을 비롯한 난치병 정복을 위한 개인 맞춤형 의학의 길을 연 것이다.
제브라피시 활용 더 활발해질 것
제브라피시는 신약 개발의 최전방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신약 개발에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 자본이 투입된다. 세포주 수준의 대규모 신약 후보군 스크리닝, 고등동물 실험, 인간 대상 임상시험을 통한 효과 및 안정성 확인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제브라피시 질병 모델을 활용하면 이 절차들을 상당히 효율화할 수 있다. 일반적인 신약 후보군 스크리닝은 세포주 수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제브라피시는 대규모 스크리닝이 가능해서 소형 동물 모델에서 직접 진행할 수 있다. 또한 생후 5일 내에 대부분 기관이 형성되므로, 유생 단계에서 특정 기관에 미치는 약물 효과를 분석할 수 있다.
최근 급속히 발전한 이미징과 AI 자동화 스크리닝 시스템은 대규모 신약 스크리닝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해준다. 현재 미국과 유럽은 제브라피시를 이용해 면역질환, 항생제 부작용 및 암과 관련된 10여 개 신약 물질의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2000년 이후 기초과학 실험실과 대학병원 등에서 제브라피시의 활용이 급격히 늘었다.
질병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은 생명과학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다. 이를 위해서는 임상, 기초과학,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협업해야 한다. 기초와 임상이 겹치는 영역에 존재하는 중개의학은 협업의 플랫폼 역할을 한다. 여기서 제브라피시는 질병 기전의 이해와 신약 개발에 훌륭한 실험 도구가 된다. 인류의 건강한 삶을 위해, 검은 줄무늬를 가진 작은 열대어는 오늘도 열심히 헤엄치고 있다.
<저자 소개>
이윤성 IBS 유전체 항상성연구단 연구위원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 항상성 연구단 연구위원이다. 발생유전학자이면서 질환 관련 유전자 기능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조혈줄기세포의 발생 기전과 혈액질환, 그리고 암 발생에 관련된 유전자의 기능 연구를 제브라피시를 모델로 이용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4월호에 실렸습니다.
2021년 기준 대한민국 평균수명이 83세를 기록했다. 110여 년 전 22세에 불과했던 평균수명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단연 의료기술의 비약적 발전 덕분이다. 질병의 진단·치료·예방에는 환자의 임상 정보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생명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생명현상에 대한 기초과학의 연구결과를 임상의학에서 실제 사용할 수 있도록 연계하는 학문을 ‘중개의학(Translational Medicine)’이라 한다. 중개의학은 다양한 분야의 기초과학 지식을 통해 포괄적으로 임상효과를 높인다. 21세기 초 인간 유전자 지도를 해석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로 대표되는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발전이 중개의학의 초석이 되었다. 유전자 연구의 라이징스타, 제브라피시
생물정보학은 질병의 유전적 원인 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질병과 유전자 사이의 상관관계가 밝혀지면, 해당 유전자와 실제 질병의 구체적 연관성을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위해 현대 생물학은 세포부터 고등동물까지 다양한 수준의 실험적 접근법을 사용한다. 여기에 2cm 가량의 조그마한 열대 물고기가 대활약을 펼치고 있다. 얼룩말(zebra)처럼 검은 줄무늬를 지닌 물고기, ‘제브라피시(zebrafish)’다.
제브라피시(또는 다니오제브라)는 수족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어종으로, 학명은 다니오 레리오(Danio Rerio)다.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이 용이하며, 좁은 공간에서 대량사육도 가능하다. 척추동물로서 뇌, 심장, 간 등 인간이 지닌 기관을 갖고 있으며, 온몸이 투명해 배아 발달 및 약물의 체내 반응 과정을 육안으로 살필 수도 있다. 이러한 장점들 때문에 차세대 실험동물로 각광받는다.
제브라피시는 1970년대부터 실험동물로 활용되었다. 미국 오리건 대학의 조지 스트레이싱어 교수가 관상용 제브라피시와 인도가 원산지인 제브라피시를 교배하여 최초로 실험용 모델을 제작해냈다. 1990년대 들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유럽의 뉘슬라인 볼하르트 교수와 미국의 볼프강 드리에베르 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은 제브라피시를 이용하여 최초의 대규모 유전자 기능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진은 초파리 유전연구에서 사용된 무작위 돌연변이 유발(random mutagenesis)을 이용해 돌연변이 4000여 개를 제작했다. 이렇게 제작한 각 돌연변이의 표현형 연구를 통해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규명해냈다.
과학계에 제브라피시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논문 저자 대부분이 현재 전 세계 명문대학에 소속되어 질병연구의 석학으로 인정받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2010년대에는 제브라피시유전자의 80%가량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제브라피시를 통해 인간 유전자의 기능과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게 됐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제브라피시의 과학적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제브라피시가 밝힌 여러 질병
유전자 기능을 규명하는 가장 명쾌한 방법은 ‘유전자 기능 저해’다. 한마디로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없앤 후 이상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령 유전자 X를 저해했을 때 적혈구 세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유전자 X가 적혈구 발생에 필요함을 의미한다. 제브라피시는 이 방식에 최적화된 3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척추동물로서는 드물게 특정 생명현상과 관련된 새로운 유전자를 찾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무작위 돌연변이’를 적용할 수 있다. 번식이 용이하고 유생 크기가 작아 대규모 표현형 스크리닝이 가능하고 유전체 정보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포유류와 달리 체외수정을 하기 때문에 수정란 단계에서 유전자 저해 기능 물질을 주입하여 해당 유전자의 기능을 신속하게 분석할 수 있다.
셋째, 유전자가위와 같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원하는 유전자의 기능을 골라 정확하게 영구 저해할 수 있다.
제브라피시 질병 모델은 질병 관련 후보 유전자를 변이·억제·과발현시켜 제작한다. 이는 대사질환, 염증 및 감염질환, 암 등 질병 기전의 과학적 규명에 이용되고 있다. 특히 당뇨병 및 비만 관련 유전자를 찾고, 비소와 같은 환경요인이 지방간 등 대사질환에 악영향을 끼침을 밝혀냈다. 암 분야에서도 제브라피시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뇌, 혈액, 피부 등 다양한 기관 특이적 암과 관련 유전자 기능을 찾아내고 있다. 제브라피시 덕분에 환자 맞춤형 항암 치료의 가능성도 높아졌다.
환자의 암세포를 제브라피시에 배양한 암 아바타 모델에 다양한 항암 치료를 적용하면, 어떤 치료법이 적합한지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기존 치료제에 내성을 보이는 환자에게 새로운 해결법을 제공한다. 암을 비롯한 난치병 정복을 위한 개인 맞춤형 의학의 길을 연 것이다.
제브라피시 활용 더 활발해질 것
제브라피시는 신약 개발의 최전방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신약 개발에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 자본이 투입된다. 세포주 수준의 대규모 신약 후보군 스크리닝, 고등동물 실험, 인간 대상 임상시험을 통한 효과 및 안정성 확인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제브라피시 질병 모델을 활용하면 이 절차들을 상당히 효율화할 수 있다. 일반적인 신약 후보군 스크리닝은 세포주 수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제브라피시는 대규모 스크리닝이 가능해서 소형 동물 모델에서 직접 진행할 수 있다. 또한 생후 5일 내에 대부분 기관이 형성되므로, 유생 단계에서 특정 기관에 미치는 약물 효과를 분석할 수 있다.
최근 급속히 발전한 이미징과 AI 자동화 스크리닝 시스템은 대규모 신약 스크리닝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해준다. 현재 미국과 유럽은 제브라피시를 이용해 면역질환, 항생제 부작용 및 암과 관련된 10여 개 신약 물질의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2000년 이후 기초과학 실험실과 대학병원 등에서 제브라피시의 활용이 급격히 늘었다.
질병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은 생명과학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다. 이를 위해서는 임상, 기초과학,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협업해야 한다. 기초와 임상이 겹치는 영역에 존재하는 중개의학은 협업의 플랫폼 역할을 한다. 여기서 제브라피시는 질병 기전의 이해와 신약 개발에 훌륭한 실험 도구가 된다. 인류의 건강한 삶을 위해, 검은 줄무늬를 가진 작은 열대어는 오늘도 열심히 헤엄치고 있다.
<저자 소개>
이윤성 IBS 유전체 항상성연구단 연구위원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 항상성 연구단 연구위원이다. 발생유전학자이면서 질환 관련 유전자 기능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조혈줄기세포의 발생 기전과 혈액질환, 그리고 암 발생에 관련된 유전자의 기능 연구를 제브라피시를 모델로 이용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4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