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A 박차고 나왔다"…40년 전 한국에 인터넷 뚫은 주인공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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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
1982년 5월. 경북 구미에 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전신) 컴퓨터 개발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흘렀다. 모니터에 서울대 컴퓨터를 뜻하는 ‘SNUCOM’이라는 글자가 뜨자 연구원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구미에서 250㎞ 떨어진 서울대 연구실에서 보내온 메시지였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 연결의 순간'이다. 미국에 이은 세계 두 번째였다. 미국이 인터넷 프로토콜(TCP/IP) 기술의 대외 유출을 막던 시절, 독자 연구를 통해 이뤄낸 개가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은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79)다. 일본에서 태어난 전 교수는 오사카대를 졸업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시스템 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1979년 36세의 나이에 한국행을 택했다. 조국의 정보기술(IT) 발전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서였다.
전 교수는 한국 인터넷 역사의 시작점을 찍고 오늘날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2012년에는 인터넷 프로토콜(TCP/IP)의 설계자인 빈트 서프, 월드와이드웹(WWW) 창시자 팀 버너스 리, 리눅스 개발자 리누스 토발스 등과 함께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한국인으로는 전 교수가 유일하다. 올해로 한국은 인터넷 40주년을 맞았다. 지난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에서 만난 전 교수는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글로벌 생태계에서 리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내 인터넷 기업들도 한국을 넘어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발전할 거라고 생각은 못 했죠. 당시 유네스코에서 조사한 게 있어요. 아시아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필리핀이나 태국 정도가 언급되고, 한국은 껴있지도 못했죠. 그때만 해도 한국은 살기도 힘들 때니까요. 우리가 엄청나게 비싼 컴퓨터 이용해서 인터넷 개발했죠. 일부에선 불필요한 연구라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래도 밀어붙였죠. 그런데 지금 보면 뭔가 아쉬운 것도 있어요. 1980년대에는 분명히 우리가 통신 분야를 리드하는 국가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런 나라들이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죠."
▶그래도 한국 인터넷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 아닙니까.
"속도가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죠. 사실 우리가 인터넷을 '잘 쓰고 있다'고 얘기하려면 리더로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글로벌 인터넷 생태계에서 우리 역할이 미미하죠. 인터넷 거버넌스(관리 체제) 논의에서 이제 한국은 안 보입니다. 1990년대 이후에 좀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게 잘 이뤄지지 못했어요. 저 같은 엔지니어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모두 다 같이 노력해야만 가능한 거죠. 인터넷 부작용도 잘 처리하지 못한 거 같아요. 개발에만 치우치면서 보안, 악성 댓글 문제 등 그런 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죠."
▶인공지능(AI)에 대해서도 일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렇죠. AI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터넷과 AI는 같이 가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그동안 급속도로 성장해 왔는데 발전도 중요하지만 사회 문제 등도 잘 생각해야죠. 물론 이제는 인터넷이나 AI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으로 10년 정도 나타나는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그런 뒤에는 다음 세대가 주인공이 돼야죠."
▶교수님은 우리가 '세계 인터넷 강국 10위권'에만 들어도 좋다고 말씀하시는데요.
"현실적으로 한국이 세계 1등, 2등이 되긴 어렵죠. 대략 5~10등 사이면 좋을 거 같아요. 만약 15등 정도 되면 우리가 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거 같고요. 우리가 무엇이든 새로운 시도는 잘해요. 예를 들어 일본 같은 나라는 뭘 하든 항상 시간이 오래 걸리죠. 그래서 자꾸 기회를 놓치는 거죠. 우리는 유연성은 좋은 편이에요. 스타트업처럼 시도를 잘하죠. 그런데 우리는 '분단국가'라는 한계도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도 있고, 지정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위치에 있죠. 그래서 보안 문제도 많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우리가 보안 기술을 주도할 기회가 될 수 있어요."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인터넷 기업이 글로벌 사회에서 큰 역할은 못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거의 국내 시장만 보고 있는 거 같아요.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사실 국내 기업들의 10~20% 정도는 세계 시장을 바라보는 벤처기업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실력이 있어요. 미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도 많아요. 우리가 해외에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는 것도 생각해야겠죠."
▶요즘 블록체인 기술과 맞물려 '웹 3.0' 논의도 나옵니다. 인터넷이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보십니까.
"제가 인터넷의 미래를 말하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다만 생각해 보세요. 왜 우리가 그런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요. 블록체인, 웹 3.0, NFT(대체불가능토큰) 등의 분야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한국이 통신 시장을 빠르게 개척했잖아요. 능력 있는 인재들을 국가 차원에서 좀 더 키워야 하는데 그걸 잘하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새로운 기술을 주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창업 생태계가 발전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능력으로 질 건 없어요. 다만 교육 시스템도 좀 바뀌어야 할 거 같아요. 미국 스탠퍼드대에 가면 이런 코스까지 있어요. 컴퓨터공학 전공자와 경영학 전공자가 같이 창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거죠. 기획이 좋다 싶으면 실제로 창업으로 이어져요. 우리도 그런 것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죠. 한국도 대학에서 벤처들이 꽤 나오고 있는데 그런 시도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한국에서는 4·19가 일어났고,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건(미·일 안전보장조약 개정 반대 시위)이 있었죠. 오사카에 있는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다 모였어요. 고등학생은 한 5000명 정도였는데 제가 전체 학생 대표로 연설하게 돼 있었죠. 그런데 연설문 초안에 있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문장을 읽는데 '우리나라'라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건데 극한 상황에 가니까 깨달은 거죠. '아, 나는 한국인이구나'라는 것을 절감했죠."
▶결국 1979년 한국으로 오셨는데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좀 긴장했죠. 1979년이 어떤 해인지 아세요?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한 해죠. 12·12사태도 일어났고요. 저는 처음에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KAIST 갔는데 매우 만족했어요. 웬만한 대학교보다 지원을 훨씬 잘해줬죠. 1982년부터 2008년까지 26년간 KAIST에서 있었어요."
▶어릴 적부터 수학을 좋아하셨다고 하시던데요.
"저는 반대로 말하고 싶네요. 다른 공부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수학은 오랫동안 고민해서 명쾌한 답이 나온다는 게 좋았죠. 한때는 '네팔에서 높은 산을 바라보며 수학 문제를 풀면 행복할 거 같다'는 생각도 했죠. 그런데 수학을 전공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저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은 거 같지도 않았고요. 그러다가 '응용 수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컴퓨터를 한 거죠. 의사를 할까 싶기도 했는데 소독약 냄새를 맡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한국에서는 왜 과학 분야 노벨상이 나오지 못할까요.
"제가 외국에 가면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할 말이 없죠.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히 공부도 잘하고, 경제 수준도 높은데 왜 노벨상이 없을까요. 벌써 나왔어야 하는데요. 우리나라 정도면 5년에 한 명, 10년에 한 명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그게 안 되는 거는 반성해야죠. 그런데 제가 살펴보니까 노벨상을 갑자기 받는 게 아니고 한 단계 아래 상을 받았던 사람들이 결국 노벨상까지 올라가더라고요.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시스템 공학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이번에 수학계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받은 허준이 교수도 한국 공교육 시스템에서 수학에 대한 흥미를 크게 못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를 만나 수학자로서 길을 걷게 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포스트닥(박사후연구원)을 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죠. 물론 꼭 유학을 할 필요는 없어요.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한국이든 미국이든 판단을 잘해야겠죠"
▶KAIST 퇴임 뒤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존경하는 선배들이 은퇴할 생각이 없으니까 저도 열심히 해야죠. 요즘 제일 가깝게 연락하고 있는 분이 데이비드 파버 교수인데요. '인터넷의 할아버지'로 불리는 분이죠. 파버 교수는 나이가 아흔 가까이 되는데 지금 일본 게이오대 사이버 문명연구센터 책임자입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초청했어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KAIST에서 각각 한 번씩 강연할 거예요. 나이가 91세인 프랑스의 인터넷 선구자, 루이 푸쟁 교수는 다음달 중국에서 열리는 인터넷 관련 국제행사에 저와 함께 참석할 예정이고요."
▶운동도 좋아하시고, 최근엔 미국 여행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등산을 좋아했어요. 수영은 초등학교 때부터 했고요. 이번에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반대쪽에 있었죠. '하이 시에라'라는 곳인데 1만 피트 넘는 산들이 있고요. 눈도 있죠. 요즘엔 너무 피곤하니까 자동차로 조금 올라갔다가 하이킹하는 식으로 산을 즐기고 있어요. 거의 매년 여름에 가요. 와이프(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도 같이 가고요."(전 교수는 이름난 운동광이다. 1980년 등반대장으로 유럽 3대 북벽(마테호른·그랑드조라스·아이거) 등정에 성공해 국민훈장 기린장도 받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10년 뒤면 대한민국 인터넷 50주년이잖아요. 그래서 관련 행사를 준비하고 있죠. 이제는 제가 주도적으로 할 건 아닌 거 같고,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다음 행사는 100주년이 될 테고, 그건 다음 세대가 해야겠죠. 그때면 이제 우리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요." 참, 한가지 더
전길남 교수와 제자들
전길남 KAIST 명예교수는 1982년부터 2008년까지 KAIST 전산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가 있었던 시스템구조연구실(SA랩)은 뛰어난 논문을 쓰고 대학교수가 되려는 학생들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벤처기업 창업에 도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전 교수 역시 제자들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 왜 꼭 교수나 연구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 대신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해보라"고 조언하곤 했다.
전 교수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제자로는 한국 최초의 인터넷 회사인 아이네트를 창업하고, 4~8대(2003~2011년) 인터넷기업협회장을 역임한 허진호 전 세마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대표도 있다. 허 대표는 1983년부터 7년간 KAIST에 있으면서 전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당시 우리 SA랩에서는 벤처에 도전하지 않고 교수가 된다고 하면 주류에서 밀려나는 분위기"라고 했다.
고인이 된 김정주 넥슨 창업자도 전 교수의 제자다. "김정주는 정말 똑똑했던 친구인데 안타까워요. 거의 항상 톱에 있었던 학생이었어요. 한국에서 디즈니 같은 회사를 만들고 싶어 했죠. 초등학교 때 음악(바이올린)도 잘해서 줄리아드 예비학교까지 다녔어요. 대학원에서는 저에게 암벽 등반 배운 게 제일 좋았다고 하더군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데 정말 도움이 된다면서요. 그런데 남극에서 무슨 제일 높은 산 갔다가 크게 혼났다고 말하기도 했었는데…." 전 교수는 안타까운 듯 말을 흐렸다.
리니지·바람의나라 게임을 만든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전 교수에게서 전산학을 배웠다. 전 교수는 "송재경이는 처음부터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며 "머리가 매우 좋았던 제자"라고 회상했다.
SA랩은 당시 국내 1세대 벤처의 산실 역할을 했다. 네오위즈에서 '원클릭 서비스'를 만든 나성균 대표, 정철 전 삼보컴퓨터 대표, 박현제 전 솔빛미디어 대표 등도 전 교수의 제자다. 이들은 사회에 나가기 전 원칙주의자인 전 교수 밑에서 탄탄한 실력을 쌓아갔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은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KAIST 명예교수(79)다. 일본에서 태어난 전 교수는 오사카대를 졸업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시스템 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1979년 36세의 나이에 한국행을 택했다. 조국의 정보기술(IT) 발전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서였다.
전 교수는 한국 인터넷 역사의 시작점을 찍고 오늘날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2012년에는 인터넷 프로토콜(TCP/IP)의 설계자인 빈트 서프, 월드와이드웹(WWW) 창시자 팀 버너스 리, 리눅스 개발자 리누스 토발스 등과 함께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한국인으로는 전 교수가 유일하다. 올해로 한국은 인터넷 40주년을 맞았다. 지난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에서 만난 전 교수는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글로벌 생태계에서 리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내 인터넷 기업들도 한국을 넘어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넷 글로벌 경쟁...속도 1위 대신 생태계 '리더' 돼야"
▶한국 인터넷 40주년을 맞는 감회가 어떠십니까."사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발전할 거라고 생각은 못 했죠. 당시 유네스코에서 조사한 게 있어요. 아시아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필리핀이나 태국 정도가 언급되고, 한국은 껴있지도 못했죠. 그때만 해도 한국은 살기도 힘들 때니까요. 우리가 엄청나게 비싼 컴퓨터 이용해서 인터넷 개발했죠. 일부에선 불필요한 연구라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래도 밀어붙였죠. 그런데 지금 보면 뭔가 아쉬운 것도 있어요. 1980년대에는 분명히 우리가 통신 분야를 리드하는 국가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런 나라들이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죠."
▶그래도 한국 인터넷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 아닙니까.
"속도가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죠. 사실 우리가 인터넷을 '잘 쓰고 있다'고 얘기하려면 리더로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글로벌 인터넷 생태계에서 우리 역할이 미미하죠. 인터넷 거버넌스(관리 체제) 논의에서 이제 한국은 안 보입니다. 1990년대 이후에 좀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게 잘 이뤄지지 못했어요. 저 같은 엔지니어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모두 다 같이 노력해야만 가능한 거죠. 인터넷 부작용도 잘 처리하지 못한 거 같아요. 개발에만 치우치면서 보안, 악성 댓글 문제 등 그런 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죠."
▶인공지능(AI)에 대해서도 일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렇죠. AI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터넷과 AI는 같이 가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그동안 급속도로 성장해 왔는데 발전도 중요하지만 사회 문제 등도 잘 생각해야죠. 물론 이제는 인터넷이나 AI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앞으로 10년 정도 나타나는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그런 뒤에는 다음 세대가 주인공이 돼야죠."
▶교수님은 우리가 '세계 인터넷 강국 10위권'에만 들어도 좋다고 말씀하시는데요.
"현실적으로 한국이 세계 1등, 2등이 되긴 어렵죠. 대략 5~10등 사이면 좋을 거 같아요. 만약 15등 정도 되면 우리가 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거 같고요. 우리가 무엇이든 새로운 시도는 잘해요. 예를 들어 일본 같은 나라는 뭘 하든 항상 시간이 오래 걸리죠. 그래서 자꾸 기회를 놓치는 거죠. 우리는 유연성은 좋은 편이에요. 스타트업처럼 시도를 잘하죠. 그런데 우리는 '분단국가'라는 한계도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도 있고, 지정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위치에 있죠. 그래서 보안 문제도 많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우리가 보안 기술을 주도할 기회가 될 수 있어요."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인터넷 기업이 글로벌 사회에서 큰 역할은 못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거의 국내 시장만 보고 있는 거 같아요.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사실 국내 기업들의 10~20% 정도는 세계 시장을 바라보는 벤처기업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실력이 있어요. 미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도 많아요. 우리가 해외에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는 것도 생각해야겠죠."
▶요즘 블록체인 기술과 맞물려 '웹 3.0' 논의도 나옵니다. 인터넷이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보십니까.
"제가 인터넷의 미래를 말하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다만 생각해 보세요. 왜 우리가 그런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요. 블록체인, 웹 3.0, NFT(대체불가능토큰) 등의 분야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한국이 통신 시장을 빠르게 개척했잖아요. 능력 있는 인재들을 국가 차원에서 좀 더 키워야 하는데 그걸 잘하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새로운 기술을 주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창업 생태계가 발전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능력으로 질 건 없어요. 다만 교육 시스템도 좀 바뀌어야 할 거 같아요. 미국 스탠퍼드대에 가면 이런 코스까지 있어요. 컴퓨터공학 전공자와 경영학 전공자가 같이 창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거죠. 기획이 좋다 싶으면 실제로 창업으로 이어져요. 우리도 그런 것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죠. 한국도 대학에서 벤처들이 꽤 나오고 있는데 그런 시도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한국, 노벨상 5~10년에 한번은 나와야...다른 상 많이 도전해야 가능"
▶4·19 혁명이 일어날 때 조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하던데요."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한국에서는 4·19가 일어났고,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건(미·일 안전보장조약 개정 반대 시위)이 있었죠. 오사카에 있는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다 모였어요. 고등학생은 한 5000명 정도였는데 제가 전체 학생 대표로 연설하게 돼 있었죠. 그런데 연설문 초안에 있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문장을 읽는데 '우리나라'라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건데 극한 상황에 가니까 깨달은 거죠. '아, 나는 한국인이구나'라는 것을 절감했죠."
▶결국 1979년 한국으로 오셨는데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좀 긴장했죠. 1979년이 어떤 해인지 아세요?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한 해죠. 12·12사태도 일어났고요. 저는 처음에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KAIST 갔는데 매우 만족했어요. 웬만한 대학교보다 지원을 훨씬 잘해줬죠. 1982년부터 2008년까지 26년간 KAIST에서 있었어요."
▶어릴 적부터 수학을 좋아하셨다고 하시던데요.
"저는 반대로 말하고 싶네요. 다른 공부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수학은 오랫동안 고민해서 명쾌한 답이 나온다는 게 좋았죠. 한때는 '네팔에서 높은 산을 바라보며 수학 문제를 풀면 행복할 거 같다'는 생각도 했죠. 그런데 수학을 전공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저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은 거 같지도 않았고요. 그러다가 '응용 수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컴퓨터를 한 거죠. 의사를 할까 싶기도 했는데 소독약 냄새를 맡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한국에서는 왜 과학 분야 노벨상이 나오지 못할까요.
"제가 외국에 가면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할 말이 없죠.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히 공부도 잘하고, 경제 수준도 높은데 왜 노벨상이 없을까요. 벌써 나왔어야 하는데요. 우리나라 정도면 5년에 한 명, 10년에 한 명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그게 안 되는 거는 반성해야죠. 그런데 제가 살펴보니까 노벨상을 갑자기 받는 게 아니고 한 단계 아래 상을 받았던 사람들이 결국 노벨상까지 올라가더라고요.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시스템 공학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이번에 수학계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받은 허준이 교수도 한국 공교육 시스템에서 수학에 대한 흥미를 크게 못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를 만나 수학자로서 길을 걷게 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포스트닥(박사후연구원)을 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죠. 물론 꼭 유학을 할 필요는 없어요.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한국이든 미국이든 판단을 잘해야겠죠"
▶KAIST 퇴임 뒤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존경하는 선배들이 은퇴할 생각이 없으니까 저도 열심히 해야죠. 요즘 제일 가깝게 연락하고 있는 분이 데이비드 파버 교수인데요. '인터넷의 할아버지'로 불리는 분이죠. 파버 교수는 나이가 아흔 가까이 되는데 지금 일본 게이오대 사이버 문명연구센터 책임자입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초청했어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KAIST에서 각각 한 번씩 강연할 거예요. 나이가 91세인 프랑스의 인터넷 선구자, 루이 푸쟁 교수는 다음달 중국에서 열리는 인터넷 관련 국제행사에 저와 함께 참석할 예정이고요."
▶운동도 좋아하시고, 최근엔 미국 여행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등산을 좋아했어요. 수영은 초등학교 때부터 했고요. 이번에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반대쪽에 있었죠. '하이 시에라'라는 곳인데 1만 피트 넘는 산들이 있고요. 눈도 있죠. 요즘엔 너무 피곤하니까 자동차로 조금 올라갔다가 하이킹하는 식으로 산을 즐기고 있어요. 거의 매년 여름에 가요. 와이프(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도 같이 가고요."(전 교수는 이름난 운동광이다. 1980년 등반대장으로 유럽 3대 북벽(마테호른·그랑드조라스·아이거) 등정에 성공해 국민훈장 기린장도 받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10년 뒤면 대한민국 인터넷 50주년이잖아요. 그래서 관련 행사를 준비하고 있죠. 이제는 제가 주도적으로 할 건 아닌 거 같고,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다음 행사는 100주년이 될 테고, 그건 다음 세대가 해야겠죠. 그때면 이제 우리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요." 참, 한가지 더
전길남 교수와 제자들
전길남 KAIST 명예교수는 1982년부터 2008년까지 KAIST 전산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가 있었던 시스템구조연구실(SA랩)은 뛰어난 논문을 쓰고 대학교수가 되려는 학생들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벤처기업 창업에 도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전 교수 역시 제자들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 왜 꼭 교수나 연구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 대신 세상에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해보라"고 조언하곤 했다.
전 교수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제자로는 한국 최초의 인터넷 회사인 아이네트를 창업하고, 4~8대(2003~2011년) 인터넷기업협회장을 역임한 허진호 전 세마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대표도 있다. 허 대표는 1983년부터 7년간 KAIST에 있으면서 전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 그는 "당시 우리 SA랩에서는 벤처에 도전하지 않고 교수가 된다고 하면 주류에서 밀려나는 분위기"라고 했다.
고인이 된 김정주 넥슨 창업자도 전 교수의 제자다. "김정주는 정말 똑똑했던 친구인데 안타까워요. 거의 항상 톱에 있었던 학생이었어요. 한국에서 디즈니 같은 회사를 만들고 싶어 했죠. 초등학교 때 음악(바이올린)도 잘해서 줄리아드 예비학교까지 다녔어요. 대학원에서는 저에게 암벽 등반 배운 게 제일 좋았다고 하더군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데 정말 도움이 된다면서요. 그런데 남극에서 무슨 제일 높은 산 갔다가 크게 혼났다고 말하기도 했었는데…." 전 교수는 안타까운 듯 말을 흐렸다.
리니지·바람의나라 게임을 만든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전 교수에게서 전산학을 배웠다. 전 교수는 "송재경이는 처음부터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며 "머리가 매우 좋았던 제자"라고 회상했다.
SA랩은 당시 국내 1세대 벤처의 산실 역할을 했다. 네오위즈에서 '원클릭 서비스'를 만든 나성균 대표, 정철 전 삼보컴퓨터 대표, 박현제 전 솔빛미디어 대표 등도 전 교수의 제자다. 이들은 사회에 나가기 전 원칙주의자인 전 교수 밑에서 탄탄한 실력을 쌓아갔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