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사람만 오세요"…'몸값 2000억' 8명 남자들의 정체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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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에 미친 8명의 남자가 모여 사는 이야기
스티브 잡스는 1997년 애플 최고경영책임자(CEO)로 복귀하면서 TV 광고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미친 자들에게 건배를(Here’s to the crazy ones)'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애플의 신념과도 맞닿아 있죠. 잡스는 미친 사람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젊음의 거리 홍대에도 미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에 미친 8명의 창업가 이야기입니다."일론 머스크보다 성공할 거예요. 웬 '미친 소리'냐 싶겠지만, 그런 꿈을 꾸는 사람만 여기 올 수 있죠."
서울 지하철 홍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7분 남짓 걸으면 연남동의 '힙'한 맛집 골목 사이에 3층짜리 셰어하우스 건물이 나온다.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좁은 골목, 작은 가로등 하나를 곁에 둬 밤이 되면 잘 보이지도 않는 이곳 안쪽엔 '광인회관'이 있다.
광인(狂人), 미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란 뜻이다. 창업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다. 대다수가 1990년대생들이다. 이곳에서는 8명의 창업가가 먹고, 자고, 생활한다. 누적 160억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한 인공지능(AI) 검색 엔진 플랫폼 라이너의 김진우 대표가 만든 곳이다. 김 대표는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출신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 신촌 근처에 터를 잡았다.
거주 멤버 8명 외에도 함께 살지는 않지만 '광인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인원도 11명이 있다. 삼성전자 'C랩' 출신으로 CES2023에서 혁신상을 받은 생성 AI 회사 뤼튼테크놀로지스의 이세영 대표, 제주 기반 감성 숙소 중개 서비스 '하우'를 만든 바카티오의 지현준 대표, 콘텐츠 커머스 서비스 '열정에 기름붓기'를 만든 표시형 대표 등이 일원이다.
형제가 된 '미친 자들'
한경 긱스와 만난 광인회관 멤버들은 "우리는 형제"라고 입을 모았다. 단순히 몇 달, 1년 살고 떠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형제처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뤄졌다는 얘기다. 입주 조건은 창업에 '미친 사람'이다. 밥을 먹거나 술 한 잔을 같이 하면서 얼마나 결이 맞는지 본다고 한다. 김진우 라이너 대표는 "우리는 몇백억원 짜리 회사를 세우고 엑시트해 편한 삶을 누리려는 창업가와는 맞지 않는다"며 "테슬라나 메타보다 더 큰 회사를 만들겠다는 '광인'들이 우리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광인회관의 거실에서는 종종 '파티'가 열린다. 멤버들의 생일 파티부터 친한 창업가 동료와 벤처캐피털(VC) 관계자들이 모인 거창한 모임뿐만 아니라 밤 12시가 넘어 퇴근한 멤버들끼리 갖는 소소한 맥주 파티까지 다양하다. 이 자리에서는 일에 관한 진지한 조언도 오고 간다. 김 대표는 "친한 VC를 소개해주며 투자 유치를 돕기도 한다"며 "같이 사는 것을 넘어 창업가들의 커뮤니티로 발전한 셈"이라고 귀띔했다.
이세영 뤼튼테크놀로지스 대표가 광인회관에 합류하게 된 계기도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서였다. 연세대 출신인 그는 동문인 김 대표를 학교 행사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이때 그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 대표는 "창업을 막 준비하던 시기였는데, 막막해서 무작정 진우 형을 찾아갔다"며 "하룻밤 새 광인회관 입주를 결정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아마 미친 소리인 줄 아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로움의 끝, 복숭아주 마시며 '도원결의'
김진우 대표가 광인회관을 만든 건 2019년 여름이다. 외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창업을 시작해 7년째 이어오고 있었다. 일종의 '번 아웃'이 왔다.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20대 시절을 보냈다. 또래들이 SNS 맛집을 찾아갈 때 코딩 한 줄이라도 더 했다. 일만 하다 보니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었다. 자신감이 사라져 갔다.이대로 살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었다. 어느 날 우연히 '토키와 장'에 대해서 알게 됐다. 1950~1960년대 일본 만화가들이 한 데 모여 지내면서 서로 일을 돕고 아이디어를 주고받던 주택이다. 선배 만화가가 후배를 위해 월세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아톰'을 그린 전설적인 만화가 데츠카 오사무를 배출해 낸 곳이다.
곧장 한국판 토키와 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김 대표는 "동시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등이 젊은 시절부터 끈끈히 이어진 관계라는 게 떠올랐다"며 "창업가들끼리 형제처럼 지낸다면 적어도 외롭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멤버를 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주위 창업가들은 그의 밑그림에 공감했다. 다섯 명의 초기 멤버가 모였다. 그렇게 다섯 창업가는 셰어하우스에 모여 형제가 됐다. 복숭아를 썰어 넣은 보드카를 마시며 '도원결의'도 했다. 그 집은 1997년 애플 광고에 등장했던 스티브 잡스의 '미친 자들에게 건배를(Here’s to the crazy ones)'이라는 말과 사자성어 '불광불급(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에서 착안해 광인회관으로 이름을 붙였다.
광인회관이 처음 문을 열 때 100억원이 채 되지 않았던 멤버들 회사의 총 기업가치는 이제 2000억원이 넘을 정도로 커졌다. 25명에 불과하던 회사 종업원 수도 14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4만 명 밖에 되지 않던 이 회사들의 서비스 월간 이용자 수(MAU)는 이제 1300만 명에 육박한다.
선배와 후배 연결하는 다리로
광인회관은 멤버들의 바람대로 선배 창업가와 후배를 연결하는 커뮤니티가 됐다. 고민이 있는 후배 창업가들이 언제든 방문해 술잔을 기울이며 선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어느 날 샤퀴테리(유럽식 수제 육가공품)를 만드는 한 친구가 무작정 찾아왔어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요리를 배우다가 다시 공부를 해 연세대에 들어간 특이한 친구였죠. 샤퀴테리를 갖고 본격적으로 창업을 하려 하는데 타깃은 어떻게 정할지, 제품의 포지셔닝은 어떤 식으로 할지 고민이 크다는 거예요.
바로 같이 샤퀴테리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죠. 나중엔 친해져서 그 친구가 광인회관에서 직접 요리도 했어요. 우리가 요식업을 잘 알지 못했는데도 조언을 정말 좋아했어요. 돌이켜보면 절실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대화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몰라요. 얼마나 절박하면 여기에 오겠어요. 광인회관의 처음 취지와도 잘 맞는 부분이죠."
이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나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같은 '대선배'들이 광인회관에 찾아오게 만드는 게 목표다. 김 대표는 "우선 우리가 '대박'을 쳐서 이곳을 떠나고, 새롭게 들어올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창업가들의 '선순환 공간'을 만들 예정"이라며 "10년 뒤 광인회관은 큰 꿈을 가진 창업가들의 '토키와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블록체인부터 창업동아리까지... 커뮤니티의 힘
블록체인 생태계엔 광인회관처럼 셰어하우스 마을 형태로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는 '논스'가 있다. 서울 강남구 일대에 1~5호점이 마련돼 있다. '논숙자'로 불리는 100여 명의 입주자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창업가와 개발자부터 예술가까지 블록체인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 모였다. 입주를 위해선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거쳐 기존 입주자들의 동의까지 얻어야 한다. DSRV나 해치랩스 같은 유명 블록체인 스타트업이 이곳을 거쳐갔다.각 대학별로 창업 동아리의 힘도 거세다. 연세대·고려대 연합 창업 동아리인 '인사이더스'는 2011년 출범 이후 40여 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배출했다. 10만원의 자본금을 2주 간 불리는 활동인 '십만원 프로젝트'나 해외 스타트업을 벤치마킹해 국내에 적용하는 활동 등을 배우는 게 특징이다. 무엇보다 값지다고 평가받는 건 선·후배 간의 돈독한 네트워크다. '인사이더스 마피아'로 불리는 동문 네트워크엔 광인회관 멤버인 김진우 라이너 대표, 우찬민 최고운영책임자(COO), 오준호 슈퍼차트 대표 등이 소속돼 있다.
서울대엔 국내 최장수 창업동아리 SNUSV가 있다. 1996년부터 60여 곳 이상의 창업팀을 탄생시켰다. 오늘의집, 이투스, 게임빌 같은 대형 회사의 창업자가 이 동아리 출신이다. VT(Ventureship Training)이라 불리는 정기 워크숍을 통해 동아리 신입 부원과 선배 창업가들의 유대감을 다지고 있다.
참, 한가지 더
창업에 '미친 자들'... 광인회관 멤버들의 면면은?
광인회관을 처음 만든 김진우 라이너 대표는 전 세계에서 한 달에 1000만 명 이상이 사용한 하이라이팅(형광펜) 서비스 '라이너'를 선보였다. 웹브라우저는 물론 라이너 앱, PDF에서 ‘밑줄 긋기’가 가능하고 하이라이트 부분을 공유도 할 수 있다. 최근엔 챗GPT 기반 초개인화 검색 서비스로 무대를 넓혔다. 구글을 뛰어넘는 정보 검색 플랫폼이 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라이너의 우찬민 COO, 정성현 COS(총괄) 등도 광인회관 멤버다.
비거주 멤버인 이세영 뤼튼테크놀로지스 대표는 비즈니스를 위한 인공지능(AI) 기반 콘텐츠 생성 플랫폼 '뤼튼'을 내놨다. 뤼튼은 출시 세 달 만에 15억개 이상의 단어를 만들어 국내 생성 AI 시장에서 활약 중이다. 40억원 이상의 VC 투자도 유치했다.
또 지현준 바카티오 대표는 제주 기반 감성 숙소 큐레이션 서비스 '하우'를 창업했다. 모든 팀원이 사업을 위해 100일간 제주도에 합숙하며 시장 점유율 20%를 만들 정도로 '미친' 팀이라는 설명이다.
백현우 플랜핏 대표는 개인 맞춤형 운동 서비스인 '플랜핏'을 창업했다. 이용자가 신체 정보를 입력하면 앱 내에서 AI와 트레이너가 이를 분석해 적절한 운동법과 강도를 추천해 주는 게 특징이다. 이 회사 윤용섭 프로덕트 리더도 광인회관에 거주하고 있다. 블록체인 보안 서비스 '수호'를 만든 박지수 수호아이오 대표와 오준호 슈퍼차트 대표도 광인회관 멤버다.
그밖에 네이버 계열 VC인 스프링캠프의 방역주·손균우 심사역도 멤버에 이름을 올렸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스타트업 띵스플로우에서 일하며 창업을 준비하는 윤희상 띵스플로우 프로덕트 리더도 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