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백신과 치료제 개발 전쟁에 뒤처졌던 일본에 대한 평가다. 미국 정부가 워프스피드(광속) 전략을 펴면서 미국 기업 모더나와 화이자가 11개월 만에 백신을 선보였고, 독일 영국 등의 기업들은 산학연 협력을 토대로 백신을 출시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 '도쿄 올림픽'을 염두에 둔 일본 정부의 정책적 고려가 있었다는 분석도 나왔지만, 일본 현지에서도 '사실상 후진국으로 전락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팬데믹 초기 전쟁에서 뒤졌던 일본이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과 먹는 치료제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면서다. 일본은 이를 통해 추후 다가올 감염병에 대한 백신과 치료제 주권을 확보해가고 있다. 올해 바이오 분야 '인기스타'로 꼽히는 항체치료제 분야에서도 일본 기업들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일본이 바이오 강국의 면모를 다시 입증하고 있다는 평가다.
출처. 다이이찌산쿄 홈페이지
출처. 다이이찌산쿄 홈페이지

코로나19 mRNA 공장 짓는 일본

9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일본제약사 다이이찌산쿄는 기타모토에 일본 첫 코로나19 mRNA 백신 공장을 짓고 있다. 이곳에서 2024년부터 연간 2000만 도즈의 백신을 생산하는 게 목표다.

다이이찌산쿄는 지난달 15일 일본 후생노동성에 코로나19 백신 후보물질 'DS-5670' 허가 신청을 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해당 백신이 기존 승인 받은 모더나, 화이자의 mRNA 백신보다 몸 속 중화항체를 더 많이 늘려준다고 발표했다. 다이이찌산쿄는 백신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오미크론 변이 대응력을 높인 코로나19 2가 백신도 개발하고 있다.

이 백신이 계획대로 허가 받으면 새로 짓는 공장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도 해당 공장 건설을 지원한다. 업체 측은 정부 지원금을 활용해 2027년까지 mRNA 백신 생산시설을 증설할 계획이라고 했다.

해당 공장을 통해 일본의 코로나19 백신 자급률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닛케이는 내다봤다. 정부 계약에 맞춰 해당 공장에서 코로나19 백신을 생산해 공급하고 나머지 생산시설은 계절독감 백신 등을 만드는 데 활용할 수 있어서다.

일본 시오노기제약과 메이지그룹 계열사인 KM바이오로직스도 각각 재조합단백질과 불활화 바이러스를 활용한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시오노기제약은 먹는 코로나19 치료제 분야에선 이미 성과를 거뒀다. 지난해 11월 일본 후생노동성으로부터 오미크론 대응에 특화된 '조코바' 시판 허가를 받았다. 화이자의 팍스로비드, 미국 머크(MSD)의 라게브리오에 이은 세 번째 먹는 코로나19 치료제다.

日 기업들, ADC·알츠하이머 시장서도 선두

코로나19 유행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서 팬데믹 기간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로 승승장구했던 미국과 유럽 기업은 '코로나 쇼크'를 겪고 있다. 경영 측면에서만 보면 일본 기업들의 후속 시장 진입은 이례적이다.

하지만 감염병 대응을 위한 국가 전략면에서 살펴보면 일본 기업들의 선택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백신과 치료제 주권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수년 내 후속 감염병이 확산할 것이란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뒤늦게라도 성과를 낸 일본과 달리 아직 코로나19 mRNA 백신과 먹는 치료제를 개발한 한국 기업은 없다. 기술 격차가 상당한 데다 정부 지원도 미흡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장 후속 감염병이 유행하면 대응력을 갖춘 일본과 그렇지 못한 한국의 피해 규모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일본 기업들은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 글로벌 빅파마들이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항체약물접합체(ADC) 선두주자인 유방암 치료제 '엔허투'는 일본 다이이찌산쿄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가 함께 개발했다.

알츠하이머 항체 치료제 시장을 열고 있는 아두헬름과 레카네맙도 일본 에자이와 미국 바이오젠의 협력으로 탄생했다. 기초과학 연구력이 탄탄한 데다 일본 제약사들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변신'을 거듭하면서 성과를 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주요 제약사 최고경영자 상당수가 외국인일 정도로 글로벌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며 "반면 한국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선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