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책적 영향·결정력…2차대전 후 독도문제 초래
미국 지명위원회(BGN)는 2008년 독도 영유권 표기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바꾸려다 방한을 앞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1주일 만에 '한국 · 공해'로 원상회복했다. 그러나 독도의 지명은 '리앙쿠르 록스'로 유지했고 미국의 많은 기관들은 독도라는 이름보다 일본이 주장하는 이름인 '다케시마(竹島)'를 병기하고 있다. 멀쩡한 우리 땅에 우리 이름 대신 일본 이름을 병기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독도를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게 아니다. 1905년 독도가 한국땅임을 알면서도 주인 없는 땅이라며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일본은 끊임없이 국제법을 들먹이며 독도 논쟁을 일으켜왔다. 일본은 1952년 1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한 '평화선' 발표 이후 외교각서를 통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편,한국이 6 · 25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이용해 1952~1953년 독도를 주일 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며 미국을 끌어들였다. 역사적 영유권 주장과 국제법의 두 측면에서 공세를 펴기 위해서였다. 독도를 노리는 일본의 도발이 비단 한 · 일 양국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이런 까닭이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가 쓴 《독도 1947》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 · 미 · 일의 독도 인식과 정책이 언제 시작됐고,연합국과 일본이 1951년에 맺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거쳐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를 다룬 독도 문제 종합연구서다. 저자는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영향력과 결정력이 전후 독도 문제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책 제목은 1952년부터 본격화한 독도영유권 논쟁이 사실은 1947년부터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독도 문제에 관한 한 · 미 · 일 3국의 인식과 정책,판단의 출발점이자 중심을 이룬 때가 1947년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이 해부터 독도에 대한 관심과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아직 정부 수립 전이었지만 남한과도정부의 조사단과 조선산악회가 독도학술조사대를 편성해 독도를 조사했던 것.당대 최고의 엘리트이자 여론주도층이 조사단에 참여해 1948년 이후 독도 문제의 전문적 연구와 국민적 공감대 확산의 주역이 됐다. 또한 독도에서 비롯된 영토수호 의지는 대마도 반환 요구로 증폭되기도 했다.
일본은 종전 직후부터 대일평화조약 체결이 국가의 중대사였고,1947년이면 조약에 관한 내부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일본 외무성은 그해 6월 독도와 울릉도를 일본의 부속도서로 명시한 팸플릿을 제작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배포했고 이는 독도 문제와 관련해 결정적 자료로 활용됐다. 이 팸플릿은 독도의 한국 이름은 없으며 한국에서 간행된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다고 허위사실을 담았으며,1948년 이후 맥아더 사령부와 미 국무부 등이 독도 문제와 관련한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는 증거 문서가 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946년 하반기부터 대일평화조약을 준비한 미국은 1947년 초부터 조약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작성된 미 국무부의 초안들은 '리앙쿠르 록스(독도)'가 한국령임을 명확히 했다. 보그스 미 국무부 지리담당관이 초안 준비 과정에서 만든 지도에는 독도가 붉은색 직선으로 표시된 한국령 안에 분명히 들어 있다.
그러나 1949년 윌리엄 시볼드 주일 미국 정치고문이 일본의 허위정보에 기초해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허위 주장을 펴면서 독도에 대한 미국의 견해는 달라졌다. 일본과 유착한 시볼드는 한국 측의 의견은 일절 듣지 않은 채 일본 외무성의 자료와 주장만 반영했다. 그는 평화조약에 독도를 일본령으로 특정해야 한다며 외무성의 거짓자료를 토대로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또 1950년 5월 대일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일본에 대한 비징벌적 조약을 추진했다. 6 · 25전쟁으로 인한 동북아 정세의 변화 속에서 미 · 일 양국이 안보와 평화를 맞교환하면서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초안과는 반대가 돼버렸다. 전후 일본이 한국령인 독도를 영토분쟁 대상 지역으로 주장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이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에 있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이유다.
저자는 "일본이 독도영유권 확보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문서 작업을 벌이고 미국을 독도 문제의 결정자로 끌어들인 데다 1950년대 동북아 지역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미국이 대일평화조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독도 조항을 배제함으로써 독도분쟁의 원인 제공자가 됐다"고 설명한다. 이후 독도문제가 한 · 일,한 · 미,미 · 일 관계에서 지닌 폭발성을 확인한 미국은 자신의 위치를 결정자에서 중립자로 조정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도 미국 행정부 내에서 독도 문제와 관련해 한국을 비난하고 일본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본문만 900쪽을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1947년 한국의 독도 조사부터 대일평화조약을 둘러싼 관련국의 주장과 대응을 꼼꼼히 쫓아가다 보면 독도 문제가 단순한 영토문제를 넘어서는 국제정치적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