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심심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시들했다. 마루에 드러누워 하늘을 자주 봤다. 그마저 심드렁해지자 할머니가 얻어온 달력 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 위로 지나가는 연필 소리가 아주 좋았다. 주로 비행기를 그렸다. 그의 집은 김포공항과 가까웠다. 그림 속에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학창시절은 서울 합정동에서 보냈다. 대학도 그곳에서 가까운 홍익대를 다녔다. 서양화를 전공했고 유화에 푹 빠졌다. 졸업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5년 동안 회화와 조각 공부에 몰두했다. 귀국해서는 성곡미술관 개관전과 서울미디어시티,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등에 참여하며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했다.

회화와 영상,설치,조각,퍼포먼스 장르를 넘나들며 철학과 종교,사회,정치 등 폭넓은 문제들을 다뤄온 그가 내년 6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제54회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 전시 작가로 뽑혔다. 미디어아티스트 이용백씨(44).그는 한국관 작가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비행기를 탔다. 전시공간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히는 베니스비엔날레의 전시 공간은 의외로 좁다. 그 중에서도 한국관은 독일관과 일본관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 있어 특별히 '머리를 써야' 한다.

1주일 동안 그곳에서 온갖 아이디어와 씨름하다 돌아온 그를 만났다. "귀국한 지 사흘 됐습니다. 그곳 코디네이터가 '작가들의 불만이 많은 줄 알고 있다'면서 그나마 자국관을 갖고 있으니 다행이지 않느냐고 달래더군요. 국가관이 33개밖에 안 되니까….북유럽은 전체가 1개관을 나눠 쓴답니다. 한국관 크기는 70평 정도인데 정사각형이 아니고 복잡해서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지 더 궁리해봐야 해요. 현장에서 생각한 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조각과 거울 작업,퍼포먼스죠."

조각이라면 그의 대표작 '피에타'가 먼저 떠오른다. 죽은 예수를 무릎 위에 놓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FRP)과 철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피에타'는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500년 전의 대리석 조각이 이용백씨의 손에서는 사이보그로 환생한 것.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하나의 형태에서 나왔다는 것도 색다르다.

"조각할 때 흙으로 소조를 한 다음 거푸집을 뜨는데 이걸 네거티브 폼이라고 하죠.그 속의 흙을 거둬내고 다시 포지티브 폼을 뜨면 그게 거푸집이죠.마지막에 거푸집을 떼내면 완성본이 됩니다. 제 작품에서는 예수가 완성본이고,성모 마리아는 거푸집이에요. 결국 '나'의 시신을 안고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그는 이번엔 거푸집을 활용해서는 세 가지 의미를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기랑 자기 거푸집이 포옹하는 것,자기랑 거푸집이 싸우는 것,죽이는 것.쉽게 얘기하면 자기사랑,자기증오,자기죽음이라고 할 수 있죠.작품의 키는 7.5m 정도 될 것 같습니다. 현장에 가보니까 확실히 욕심이 생기긴 하더군요. 백남준 선생님이 옛날에 해준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네가 잘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지 말고 실수를 줄여라.' 오버하지 말라는 얘기죠.그래서 촬영도 다시 하고 작품 완성도도 더 높일 겁니다. "

거푸집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을까. 그는 대학 시절부터 완성본보다 거푸집이 더 멋있어 보였다고 했다. 얼굴도 거칠고 형체도 망가진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끌렸다는 것.게다가 미디어와 영상을 다루다 보니 복제하고 편집하는 과정도 거푸집 아이디어와 통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거울 작업도 그의 특기다. 관람객이 화면 앞에 서면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깨지는 거울 이미지를 담은 설치 작품 '미러'가 유명하다. "거울은 7~8m쯤 되는 작품인데요,한국관 전시장이 좁아 평면으로 배치하지 못하고 세 개로 꺾어서 설치할 생각입니다. 높이는 2.4m 정도.아직 이런 시도는 없었어요. 자리가 좁아서 꺾기로 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잘된 거죠.거울이 두 가지로 깨져요. 그 중에 총알에 의해 깨지는 게 있죠.그걸 초고속카메라로 찍으면 파편이 터지는 것까지 상세히 보입니다. 소리도 들려주고.이런 기법으로 두 개의 공간과 내가 만든 공간을 관객에게 동시에 보여주는 겁니다. 외국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

퍼포먼스는 인조꽃 2만송이를 활용한 '엔젤 솔저'와 비슷한 원리로 승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의 '엔젤 솔저'는 화려한 인조 꽃무더기 속에서 꽃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전진하는 장면을 촬영한 작품이다. 예비군 훈련 받으러 가는 게 귀찮다는 후배의 푸념을 듣다 착안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영감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저는 집 밖이나 나라 밖으로 나가면 생각이 잘 떠올라요. 독일에서 공부할 때 누가 한국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고 당혹스러워했죠.내가 한국인이지만 한국을 제대로 모르는구나….그때부터 외부에서 내부를 보는 법을 배웠죠.요즘은 중국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습니다. 지금 하나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에 갔을 때 사람들이 담을 치고 있더군요.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문화의 벽'이라고 해요. 빈민촌을 안 보이게 가리는 거죠.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우리도 88올림픽 때 그랬잖아요. 일본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도쿄올림픽 때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아시아 3국에 같은 게 있구나 싶어서 구상하게 됐죠.벽을 치다 치다 결국에는 자기가 갇혀버리고 마는 식의 작업.이런 점들 때문에도 저는 서양보다 아시아에 끌려요. "

그는 3~4년 전 캄보디아에 갔을 때도 그런 걸 느꼈다고 했다. "거기에는 다리 잘린 애들이 많은데 그 중 한 거지 아이가 나한테 와서 '자본주의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요. 머리가 띵했죠.또 그 나라 차관이 마중을 나왔는데 28세밖에 되지 않았더라고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럽처럼 너무 안정된 분위기는 재미없고 시시해요. 아시아 여행을 더 많이 다니게 되고….사실 우리나라도 바깥에서 보면 다르게 보이는 게 많잖아요. "

또 하나는 미디어라고 했다. 국내 언론과 CNN을 비교해 보면 같은 사안도 다르게 보도하고 유럽 사람들끼리도 자기들 시각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아 '절대적 가치'는 없구나 하고 생각하죠.유학시절에도 유럽 애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럽이 아시아를 볼 때 직접 와서 보고 느끼는 게 아니라 교포 1.5세나 2세를 통해 보고 들은 것으로 판단하는 거죠.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 간다 하더라도 에펠탑 밑에서 사진 한 장 찍고 기념품 사는 걸로는 문화를 이해할 수 없지요. "

그가 유럽에서 본 세계지도에는 한국이 변방 끝에 표시돼 있었다. 이거 재미있네 싶어서 한국 지도를 가지고 '세계여행을 위한 두 개의 지도'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유럽 사람들이 그걸 보고 왜 유럽이 변방에 있는지 의아해하며 '낯선 새로움'에 놀란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이렇듯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도 보는 눈에 따라 다 다르다는 것,밖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에 감춰진 것이 사실은 하나라는 것,외형이 다른 거푸집과 완성본이 본질적으로는 한 몸이라는 것을 그는 경계 없는 작품으로 보여주느라 오늘도 땀을 흘린다. 그의 작업실은 어린 시절처럼 비행기 소리가 정겹게 들리는 김포에 있다.

만난 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모조품이 진품 잡아먹는 세상, 우리들 인생도 비슷하죠"

"이게 다 이미테이션(모조품)입니다. 낚시할 때 쓰는 모형 미끼죠.가짜가 진짜를 먹어버리는 세상.이런 게 한국적인 상황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했지요. 우리나라처럼 이미테이션 좋아하는 나라도 드물잖아요. 가짜 명품부터 장판,벽지까지….유럽 사람들은 대리석이면 대리석,나무면 나무,오리지널을 사용하는데 우리는 껍데기만 많이 써요. 조작된 플라스틱 같은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

이용백씨는 서울 사간동 학고재에 걸린 작품 '루어(Lure)'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루어는 작은 물고기처럼 생긴 미끼.그림 속의 루어들은 물고기보다 훨씬 화려하고 사실적이다. "참 재미있죠? 모조품들이 진품보다 화려하고 더 사실적이라는 게.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리고….우리 인생도 그렇죠?"

서양화를 전공했으니 그가 제일 잘하는 것은 그림이지만 독일로 유학가면서 조각과 미디어 영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으로 이름을 얻었고 해외에서 더 유명해졌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유화 작업을 병행한다.

"설치 작업만 하다 보면 사람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어요. 아이디어를 짤 때는 생각이 많지만 실제 작업은 중노동이죠.기계를 사용할 때도 고장날까봐 겁이 나고.즐기면서 하는 것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다시 평면 미술을 하게 됐는데 약간은 유희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또… 설치작품에 비해 크기가 작으니까 쉽게 팔리기도 하잖아요? 하하."

그는 전시관 바닥에 놓인 5.5m짜리 흰고래 작품 두 점을 가리키며 "몸집이 너무 커서 두 마리를 따로 놓았지만 사실은 한 마리를 위에 포개야 해요. 한 마리는 거푸집이고 다른 한 마리는 그 속에서 나온 건데,고래가 자신의 거푸집과 섹스하는 형태를 보여줘야 진짜거든요. 다음에 큰 전시장엘 가면 그렇게 해야죠."

그가 처음부터 조각을 전공했다면 이런 '거푸집 발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외부에서 발견하는 '나'와 '내 속에 들어 있는 나'.지난해 수입이 400만원밖에 안 되지만 작업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품은 아끼지 않는다. 평면회화이든 조각이든 영상이든 그의 손에서 나온 작품들이야말로 그를 가장 풍요롭게 해주는 '또 다른 자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