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천사' 김만덕, 왕이 소원을 묻자 "일만이천봉을 본다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정계에 여풍이 거세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까지 여성 일색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여성으로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최고의 국정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당당히 올린 여성이 있다. 김만덕이다.

정조는 특별히 그를 궁궐에 초청하고 금강산 유람까지 보내주었다. 또 정승을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그의 문집에 김만덕의 전기를 기록했다. 김만덕이 이처럼 각광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정조실록》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제주의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했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해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했다. 허락하고 나서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했다.’(정조 20년(1796년) 11월25일)

조선시대 한반도 최변방 중의 한 곳인 제주에서, 그것도 기생 출신 여자가 재물을 풀어 백성을 구제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이 사실을 실록에 기록했다는 점 또한 이례적이다. 만덕은 어떤 방식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었을까.

만덕이 살았던 조선후기 영조·정조시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전통적 산업인 농업 외에 상업에 대한 인식이 확대됐다. 상업과 유통 경제의 발달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것이 포구 무역과 객주업이다. 만덕은 포구 무역과 객주업으로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제주도가 어업과 해상 무역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만덕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만덕은 관기를 그만두고 건입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 판매하는 일종의 중개 상인이다. 관기로 있으면서 관리들과 맺은 친분도 중요한 작용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특유의 장사 수완이 큰 몫을 했다.

제주는 쌀 등의 곡물이 부족한 곳이었다. 만덕은 외부에서 반입하는 쌀이나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금의 독점권을 확보하고 이를 미역 전복 등 해산물과 교환했다. 쌀과 소금의 시세 차익으로 부를 축적, 제주도 최고의 여성 갑부가 됐다.

만덕의 선행은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정조는 궁궐에서 만덕을 만났다. 만덕의 행적은 채제공의 문집 《번암집(樊巖集)》55권에 ‘만덕전(萬德傳)’이란 제목으로 기록돼 있다.

‘만덕은 성이 김씨이며, 탐라(제주)의 양인 집안 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귀의할 바가 없었다. 기녀를 의탁해 살았는데, 점차 성장하자 관부(官府)에서는 만덕의 이름을 기안(妓案)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순종적으로 기녀 역을 행하였지만, 스스로 기녀로 대접하지는 않았다. 나이 스무 살에 그 사정을 관아에 읍소하니, 관에서 그것을 불쌍히 여겨 기안에서 제외하고 양민으로 복귀했다. 만덕은 비록 집안에 고용된 노와 거주했으나, 탐라의 남자를 남편으로는 맞이하지 않았다. 그 재주는 재산을 늘리는 데에 뛰어났다. 때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에 능하여, 팔거나 샀다. 수 십년에 이르러 자못 명성을 쌓았다.’

‘성상(정조) 19년 을묘(1795년)에 탐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시신이 침상을 이루었다. 왕이 곡식을 배에 싣고 가서 구제하기를 명했다. 바닷길 800리에 바람 편에 오가는 것이 베짜는 북과 같았으나 오히려 때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만덕이 천금을 희사(喜捨)해 쌀을 사들였다. 육지의 여러 군현 사공들이 때맞춰 이르자 만덕은 십분의 일을 취하여 친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수송했다. 부황난 자가 듣고 관가 뜰에 모여들기가 구름과 같았다.(…)목사가 만덕을 불러 임금의 분부대로 물었다. “어떤 소원이 있느냐.” 만덕이 “원컨대 서울에 한 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했다.’

금강산 기행은 거액의 기부자답지 않는 소박한 소원이었다. 1796년 만덕이 서울 궁궐에 오자 정조는 효의왕후와 함께 만덕을 격려했다. 이듬해 봄 만덕은 평생의 소원이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만덕은 ‘장안의 스타’가 돼 있었다. ‘만덕전’의 후반부는 만덕의 입경과 금강산 여행, 채제공과의 이별 이야기로 이어진다.

‘정조에게 의녀 자리를 하사받은 만덕은 정사년(1797년) 3월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동과 중향성의 기이한 경치를 두루 탐방하고, 금불(金佛)을 만나면 반드시 절을 하고 공양을 드려 그 정성을 다했다. 대개 불법이 탐라국에는 들어가지 않은 까닭에 만덕이 이때 나이가 쉰여덟이었으나 처음으로 절과 부처를 구경했다. 마침내 안문재를 넘어 유점사를 거쳐 고성으로 내려가,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통천 총석정에 올라 천하의 기이한 경치를 구경했다.’

금강산 유람 후 만덕은 벼슬을 내놓고 제주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이때 채제공을 다시 만났다. 처음 상경했을 때도 만났던 채제공은 이별의 자리에서 직접 지은 ‘만덕전’을 그녀에게 주었다. ‘만덕전’은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에 실려 그를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만덕은 제주도에 돌아온 후 15년 만인 1812년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제주 성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운이 마루’ 길가에 묻혔다고 한다. 영원히 제주의 연인으로 남기를 원한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만덕상을 제정해 또 다른 만덕을 계속 배출하고 있다. 제주의 기녀 출신에서 성공한 최고경영자(CEO)로 자리잡은 여인, 나눔의 미덕을 실천한 기부 천사 만덕. 그 덕분에 조선시대 여성사는 더욱 풍부했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