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제 가정교사와 동거를 시작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후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 어머니에 대한 연민 등이 뒤얽혔는데 이것이 예술적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예술의 목적은 두려움을 정복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루이즈 부르주아)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고통, 고독에 대한 문제를 미술로 형상화한 미국 여성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 뉴욕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99세에 눈을 감은 그는 타계하기 전까지도 작업에 몰두하며 남다른 열정을 보여줘 많은 화가들의 귀감이 됐다. 그의 첫 유작전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23일 개막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20세기 최고의 페미니즘 작가’로 꼽힌다.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회고전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1999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거대한 청동 거미 조각 ‘마망’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추상에 가까운 조각, 천과 나무 등 오브제 조각, 드로잉과 설치 등 장르와 소재를 넘나들면서 작품활동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1945~1956년 브론즈 등 다양한 금속 소재로 제작한 추상 인물 조각 ‘Personage’ 시리즈 13점이 나왔다. 1945년 회화 12점으로 첫 개인전을 연 뒤 4년 만에 뉴욕의 페리도갤러리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1938년 남편과 함께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만든 것. 등신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가늘고 단순화시켜 인간의 고독을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묘사했다.

그는 당시 이들 작품을 의도적으로 바닥에 내려놓고 전시했다. 조각이 좌대 위에 얹혀진 단순한 심미적 대상에서 벗어나 관람객의 눈높이 공간에서 소통하도록 한 것이다. 관람객들은 인간의 신체 모습을 연상시키며 홀로 서 있는 가늘고 긴 조각 주위를 걸으면서 작품과 공간의 관계를 되새기게 된다.

1990년대 이후 주목받았던 ‘밀실(Cells)’ 시리즈 중 한 점도 출품됐다. 어렸을 때 거리의 행상인들이 불렀던 프랑스 민요를 차용한 작품이다. 토끼털, 거즈, 천, 나무 등을 오브제로 활용해 보호와 억압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갖는 집의 이중적 의미를 일깨워준다. 인간의 세포 같은 쇠 그물망 안에 오브제들이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처럼 매달려 있거나 바닥에 놓여 있어 자신의 행로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부르주아는 매체가 가져다주는 친밀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일기를 쓰듯 소소한 내면의 감정과 기억들을 끄집어내 형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반복해왔다”며 “초기 작업의 원동력이 증오와 고독이었다면 말년으로 갈수록 평화와 휴식을 찾고 동시에 치유와 사랑을 작품에 녹여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달 29일까지 이어진다. (02)735-8449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