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가장 큰 도시이자 터키로 들어가는 관문인 이스탄불의 공항 이름은 ‘아타튀르크’다. 뿐만 아니다. 터키에 가면 웬만한 도시의 도로, 공원, 동상 등의 이름에도 전부 ‘아타튀르크’가 붙어 있다. 터키 공화국을 세운 건국자이자 터키의 국부(國父),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사진)를 기리기 위해서다.

‘아타튀르크’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였고, 군사 고등학교 재학 시절 케말이라는 성을 얻었다. 존칭 ‘케말 파샤’도 여기서 시작됐다. 아타튀르크라는 명예로운 성도 국민들이 지어줬다. 나라를 세운 공로 하나만으로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고, 80년 가까이 존경받고 있는 그는 다른 정치인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영국 BBC 기자였던 저자 앤드류 망고가 쓴 아타튀르크의 일대기다. 출간된 지 13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 하급 관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터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그리스 영토인 살로니카, 정치인과 군인으로서 활약을 펼친 곳은 소아시아의 앙카라였고 숨진 곳은 이스탄불이었다.

급격한 신분과 체제의 변화를 겪으며 일생 동안 여러 지역을 전전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살던 시대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오스만 제국은 600년이 넘는 영화를 뒤로 하고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고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맞았다. 패전국 오스만 제국은 전승국 연합국에 의해 철저히 분할됐다.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들이 어울려 있던 다민족, 다종교 사회였다. 민족별로 종교도 다르고 종교별로 사회 조직도 달랐던 이들 중 같은 기독교도인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기독교 민족들, 즉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이 틈을 타 오스만 제국 전체를 손에 넣으려 했다.

당시 민족의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 아타튀르크는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투르크 민족의 나라를 건설했다. 1914년 다르다넬스에서 군사적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1919년 터키 독립전쟁의 선봉장이 됐다. 1920년대 초부터 외세와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고 1923년 민족을 대표하는 새로운 정부, 터키공화국을 건국했다. 1938년 서거하기까지 15년의 대통령 재위기간 중 그는 정치, 사회, 법, 경제와 문화 등 대대적인 개혁을 일으켰다.

그는 ‘독재자와 영웅’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 지도자로도 평가받는다. 당시 터키의 일부 지식인들은 미국의 신탁통치를 절실히 원했다. 발칸 전쟁과 이어지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는 큰 혼란을 겪었다. 전쟁 후유증과 외세의 침략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아타튀르크는 터키인들의 저력을 믿었다. 외세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독립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독립을 지키고자 다양한 정책을 도입했고, 그 과정에서 독재 정치도 실시했다. 하지만 그에게 ‘독재자’라는 멍에를 씌운 건 15년간의 장기 집권 기간에만 초점을 맞춘 사람들과 세속주의 정책에 반감을 지녔던 전통 이슬람 지도자 일부였을 뿐이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영국인인 저자는 그의 영웅적 면모만을 다루지 않는다. 아타튀르크의 침대에서 함께 자고 식사할 때도 함께하던 개 ‘폭스’의 이야기, 은행 사람들과의 사소한 갈등, 그의 친한 친구 아페트에게 쓴 친필 편지의 내용 등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재조명한다.

저자는 “터키인들이 그를 독재자보다 국부로 인식하는 이유는 그가 민족의 문화와 저력을 믿고 철저히 외세 의존적인 생각을 배제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