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가 이희돈 씨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연’시리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단색화가 이희돈 씨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연’시리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우리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관계의 연속입니다. 젊은 시절 길거리와 극장, 술자리, 시장 등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인연에 주목한 게 벌써 40년이 됐네요. 불교 교리를 전혀 담지 않은 일반 그림에서도 불법(佛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추상화를 선택했죠.”

12~23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한경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색채 추상화가 이희돈 씨(64).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물감과 한지, 그물망 등을 재료로 인간, 우주, 자연의 무수한 인연을 축조하는 작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1970년대 화단을 풍미했던 ‘한국적 미니멀리즘(단색화)’에 동참하며 천지인(天地人)의 관계를 회화로 표현해 온 작가다. 미술 화방을 운영하다 당당히 전업 화가로 변신한 그는 초창기 구상회화에 주목하다가 모노크롬(단색화)으로 방향을 틀었다. 닥나무를 빻아 만든 한지와 아크릴 물감을 혼합해 캔버스에 숫자나 알파벳, 사람의 형상 같은 입체감을 만들어 내는 독특한 회화 영역을 개척해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세 번이나 입상했다.

‘인연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캔버스 위에 그물망이나 스테인리스망을 격자형으로 배열하고 20~30차례 반복적으로 색을 칠한 부조 같은 색채 추상화와 설치작품 등 20여점을 내보인다. 화려한 단색조의 직물이 펼쳐져 있거나 나무뿌리가 뻗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들이다. 그는 “작품 소재를 주로 불교에서 찾는다”고 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제 작업은 불교적 연기(緣起)에 바탕을 두고 있거든요. 그래서 불교책도 많이 읽었고, 특히 화엄경에 나오는 ‘인드라망’의 글귀가 가장 와 닿아서 이것을 평생 화제로 삼았죠.”

그는 인드라망의 의미에 대해 “세계를 구성하는 모두가 보석같이 참으로 귀한 존재이며 그 각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유기체로 더불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표작 ‘연(緣)’ 시리즈는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마치 재즈 음악처럼 풀어내 다소 즉흥적이다. 채도가 높은 선과 면, 그물망과 철망의 그림자로 구성된 작품들은 과거 작업보다 한층 관념적이다. 사실주의 풍경화에서 출발해 한국 화단에서 2세대 단색화 작가로 자리 잡은 그는 붓질이 이어질수록 변화하는 그림 맛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파주 광탄 작업실에 캔버스를 펼쳐 놓고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이상 작품을 구상합니다. 그림은 술친구 같은 것이죠. 장욱진 선생처럼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내 몸과 마음을 다 써버릴 작정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색과 선, 점의 형태로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제 그림은 무수한 공존의 관계를 일깨워 주는 마음의 통로로 이해됩니다. 붓과 물감, 캔버스는 인연을 녹여내는 ‘꽃씨’이고요. 그런 점에서 일련의 작업과정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행인 셈이죠.”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